안드로메다 성운
러시아 혁명 100주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60주년을 맞이하여
20세기 소련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SF 드디어 한국판 출간!
인본주의적 공산주의자 작가가 그리는 미래 인류를 위한 유토피아
소련 공산당은 왜 이 작품을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전설로만 전해지던 불멸의 작품을 드디어 만난다.
전 세계 39개국 언어로 재간을 거듭한 현대 러시아 문학의 정수,
이 책이 지구상 문명국 중 거의 마지막으로 한국 땅에 당도하기까지 60년이 걸렸다.
인류 구성원 대부분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한 차원 진화한 천 년 후, 혹은 삼천 년 후의 미래 지구. 성간 우주여행이 가능해진 인류는 태양계를 넘어 드디어 심우주 저편으로 수세기에 걸쳐 외계 문명을 향한 탐사를 이어가고 있다. 제37 성단탐사대의 젊은 우주 비행사 니자 크리트는 짝사랑하는 에르그 선장을 비롯 대원들과 함께 무시무시한 중력으로 성단선을 끌어 다니는 철의 행성에 불시착하게 되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수세기 전 실종된 지구의 우주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우주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생명체의 습격 앞에 이들의 운명은?
진품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 유토피아, 스페이스 오디세이!
2017년 러시아 공산혁명 100주년의 해에 이 책을 독자 여러분께 선보이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한다.
I. 이반 예프레모프(1908-1972)
이반 안토노비치 예프레모프는 상당히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난 예프레모프는 네 살에 글을 배워 여섯 살부터는 집안의 모든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908년생이니 예프레모프 출생 당시에는 아직 러시아 제국 말기였고 아버지는 목재를 거래하는 부유한 목재상이었다. 그 시대 잘 사는 집이 모두 그러했듯이 예프레모프의 집에도 책이 아주 많았다. 예프레모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H. G. 웰스 등 서구 고전 SF 작가들의 소설을 러시아어 번역으로 접할 수 있었고 이런 문학적 토양은 이후 그의 작가 경력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917년 10월과 1918년 2월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이어서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였다. 혼란의 와중에 예프레모프의 가족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예프레모프는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피난했으나 어머니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예프레모프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붉은 군대 기갑부대에서 ‘부대의 아들’로 자랐다.
예프레모프의 고향인 현재의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는 18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러시아 제국 시절의 이름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러시아 시절에는 레닌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 그리고 지금은 다시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조금 복잡한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예프레모프는 이 오래된 도시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특히 잘 정비된 국립도서관을 자주 이용했고 그러면서 당시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고생물학자 표트르 수쉬킨의 눈에 들었다. 수쉬킨의 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예프레모프는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프레모프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국립 광산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광물학과 고생물학 박물관 등지에서 근무했다. 학자로서도 예프레모프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서 1940년부터 1957년까지 러시아 화석매장학(taphonomy)의 기초를 처음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석매장학은 화석화된 고생물의 유해를 올바르게 발굴하고 보존하는 절차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질학과 생물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예프레모프의 이런 이력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역사학자 베다 콩의 탐사 장면이나 발굴 작업 묘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히틀러와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서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이 약속을 어기고 1941년 소련을 침공한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다른 나라들보다 2년 늦게 시작되며 러시아에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는 ‘위대한 조국 전쟁’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예프레모프는 전쟁 중에 심한 열병에 걸려 심장에 이상이 생겼고 오래 와병생활을 해야 했다. 작가 해제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가는 길’에 본인이 썼듯이 예프레모프의 문학 창작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예프레모프는 문학 방면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20세기 후반 현대 러시아 작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토피아 문학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예프레모프는 생전에 단편집 3권과 장편 7권을 출간했고 이 중 《안드로메다 성운》은 그의 대표작이자 현대 러시아 유토피아 소설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1967년 러시아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II-1. 사회주의 유토피아
《안드로메다 성운》은 작가 본인이 천명했듯이 유토피아 소설이다. 유토피아 문학은 서구에서 그 효시가 된 토머스 모어의 1516년작 《유토피아》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역사가 유구하다. 미국의 도스토옙스키 연구자 개리 사울 모슨에 따르면 유토피아 문학이라는 장르에 포함되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기존 유토피아 문학의 장르 공식을 따른다. 2) 이상 사회를 제시한다. 3)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상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지지한다.
예를 들면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의 1920년 작 《우리들》은 처음에는 ‘단일제국’이라는 먼 미래의 유토피아를 묘사하는 것 같지만 가면 갈수록 이 단일제국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억압적인 디스토피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므로 3)번 조건에서 탈락이다.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 작 《멋진 신세계》도 같은 이유에서 마찬가지로 탈락이다. 사실 유토피아 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조차 맨 마지막에 화자인 토머스 모어 경이 “나는 이런 사회가 이상적인지 알 수 없으며 이런 사회가 현실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을 맺으므로 유토피아 문학의 효시인 이 작품조차 거기 묘사된 유토피아가 작가가 의도하고 지지하는 유토피아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유토피아 문학이라는 장르의 존재 여부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방금 시작한 논의가 한 페이지도 지나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기 전에 서둘러 1)번 조건을 검토하자면 유토피아 소설의 정립된 장르 공식은 대략 여행기 형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역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어의 《유토피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원 중 한 명이 토머스 모어 경의 연회에 참석하여 자신이 항해 중에 발견한 이상 사회인 유토피아 섬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형식은 이후 거의 장르 공식으로 굳어져서 대략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까지는 공간적으로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항해하다가 이상적인 사회를 발견한다는 줄거리가 유행했고 지구상에 미지의 세계가 별로 남지 않게 된 19-20세기 이후에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여행하여 먼 과거나 먼 미래의 이상 사회를 묘사하는 유토피아 소설들이 유행하게 되었다. 여행기 형식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우리(독자)와 같은 시공간에 속하는 여행자가 떠나온 현실 세계를 여행하면서 둘러본 이상 세계와 비교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토피아 소설의 요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을 이용하여 합리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의 부족한 점을 꼬집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가상의 이상 사회라는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이런 식으로 쓰면 소설이 지독하게 재미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유토피아 소설들은 대부분 재미가 없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이상 사회이며, 이상 사회는 이미 안정적이고 완벽하므로, 사건이라고 할 만한 불안정한 상황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기 형식은 이런 면에서도 유용하다. 유토피아 자체가 재미없으니까 유토피아로 가는 여정을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채우거나 도착해서 이상 사회를 둘러보는 에피소드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객의 시선으로 참신하게 묘사할 수 있다. 이런 재미라도 끼워 넣지 않으면 유토피아 소설은 문학 작품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정치학 혹은 경제학 논문이 되어버린다. 앞서 말한 플라톤의 《국가》를 두 장만 읽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안드로메다 성운》은 유토피아 소설로서 상당히 특이한 작품이다. 일단 작가 본인도 설명했듯이 유토피아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유토피아가 이미 이루어진 사회에서 그 안에서 태어나 자란 내부인의 시선으로 이상 사회를 살펴본다. 물론 작가가, 혹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불완전한 현실과의 대조를 위해서 과거에 대한 논의도 자주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어쨌든 ‘위대한 원의 시대’는 이미 정립된 유토피아이다. 미래의 지구인들은 집값도 아이 학원비도 군입대도 정리해고도 경력단절도 노후 생계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완성된 공산사회에서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은 사회에서 제공한다. 자녀 양육이나 교육도 유아기부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이후까지 사회에서 전부 해결해주며 게다가 이상 사회에 적합한 지적, 도덕적, 신체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을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무척 공들여 키워준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노화가 사라져서 언제나 젊은 몸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배우고 싶은 건 뭐든지 배우고 하던 일이 재미없어지면 그만두고 다른 분야를 배워서 다른 삶을 살 수 있고 심지어 이런 삶의 변화를 사회에서 권장하기까지 한다. 쓰다 보니까 나도 당장 여기 가서 살고 싶다.
그러나 예프레모프가 《안드로메다 성운》을 집필한 이유는 모든 것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만 살아가는 미래인을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작가의 말에서 그가 거듭 강조했듯이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과학기술과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지금 우리보다 몸도 마음도 훨씬 더 건강한 유토피아의 사람들이 우주에 도전하여 다른 행성의 지적 생명체와 접촉하는 이야기이다. 예프레모프는 생물학과 고고학을 연구했던 학자로서 생명체가 지적으로 발달하면 반드시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문학가이자 인본주의자로서 예프레모프는 이러한 지적 생명체가 지성만 발달시키고 도덕성이나 공감능력은 뒤떨어지는 경우라면 사회 전체가 불균형해져서 이상적인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프레모프의 이상 사회는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예술적으로 지금보다 더 발달한 인간이 자신과 비슷한 아름답고 지적이며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외계 생명체와 접촉하여 우주 전체가 서로 협동하고 교류하는 조화로운 세계이다. 예프레모프의 세계관 안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그 사회 전체와 언제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기술과 지식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의 정서와 감정도 사회 전체의 기쁨이나 슬픔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회로 발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성원 개개인이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야 한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묘사한다는 것은 유토피아 소설의 기본 전제여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이상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정서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유토피아 문학에서 은근히 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유토피아 문학은 이상 사회의 체계나 구조, 사회구성의 철학을 논파하는 데 치중하고 그런 뒤에 ‘이렇게 이상적인 사회니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당연히 행복하겠지’ 하고 가정하고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여행기 형식인 경우에는 외부인의 입장에서 단기간 이상 사회를 구경하는 여행자가 그 안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유토피아인의 심리나 생활을 깊이 이해하는 줄거리 전개 자체가 무리인 측면이 있다. ‘이상 사회에서 살아가는 건강하고 지적이고 아름답고 우월한 미래인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우리와 똑같이 도전하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상 사회를 배경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안드로메다 성운》은 유토피아 소설 중에서도 인본주의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II-2.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러나 이 이상 사회의 아름답고 건강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인간들은 도무지 제대로 연애를 하지 못한다. 제37 성단탐사대의 항해사 니자는 에르그 선장을 사랑하지만, 대원과 선장이라는 단체생활의 관계와 성단탐사라는 과업을 언제나 우선하다가 선장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 괴물의 공격을 막아내고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4분의 3이 넘어갈 때까지 니자와 에르그 선장은 사랑을 고백하기는커녕 제정신인 상태에서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못한다. 베테르와 베다도 마찬가지다. 서로 호감이 있는 남녀가 스텝 초원에 단둘이 남겨져 밤에 추워서 모닥불 피우고 둘이 붙어 앉았는데, 이 낭만적인 장면에서 난데없이 인류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을 주제로 토론하더니 역시나 난데없는 황소의 습격을 모면하고는 손 한 번을 안 잡고 상관도 없는 엉뚱한 발굴현장으로 가서 각각 남자 기숙사, 여자 기숙사로 들어가 버리는 전개를 번역하면서 본 역자는 양성이 평등한 이상 사회에서 게다가 작가가 인간의 정서와 감정과 행복에 그토록 신경을 썼다는데 연애도 제대로 못 하는 사회가 대체 무슨 이상 사회인지 깊이 좌절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협회에서는 1932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비에트 연방 전체의 공식적인 예술사조로 천명하였다.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어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까지 약 60년간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련을 포함하여 모든 공산국가의 공식적인 예술사조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노동자, 농민, 군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사회주의 신조에 따라 공산주의적인 이상 사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나 결과를 주로 묘사하는 예술사조이다(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소유하는 경제체제이며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을 딱히 사회라기보다는 모두가 공유하는 경제체제이므로 약간 차이가 있지만 편의상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문학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식에 따른 줄거리로 나타났다.
젊은 주인공이 당 중앙에서 과업을 부여받아 멀리 떨어진 낙후된 시골마을로 간다. 여기서 과업은 주로 댐 건설이나 도로 건설, 발전소 건설 등 대형 기간산업 건설과 관련된다.
낙후된 시골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돌아가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젊은 주인공의 노력은 마을 사람들의 반감을 살 뿐이다.
젊은 주인공은 당에 대한 충성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계속 노력하고 마을 사람들도 차츰 마음을 연다. 특히 마을에서 연배가 있고 경험 많고 인정받는 남성이 젊은 주인공의 멘토가 되어 도와준다.
이때 전형적으로 주인공은 멘토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연애를 못 한다! 왜냐하면 과업이 중요하니까!! 공산주의의 실현과 과업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에는 “가을걷이 전투가 끝나면 너와 결혼하겠어.” 막 이런 대사가 대단히 낭만적인 것처럼 등장한다!!! 독자/역자는 분노한다!!!
부패한 관료주의자들이 젊은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여 드디어 과업의 달성이 가까워진다.
부패한 관료주의자들이 과업 달성을 방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이로 인해 과업 달성 직전에 큰 사고나 재난 등의 비극이 발생하며 젊은 주인공의 멘토가 이 과정에서 영웅적으로 자신을 희생한다.
멘토의 희생과 젊은 주인공의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노력으로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과업을 달성하며 부패한 관료주의자들은 벌을 받는다. 끝.
호주 출신의 소련 문화 연구자 카테리나 클라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연구한 《소비에트 소설(The Soviet Novel)》에서 이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생산소설’의 구조를 분석하고 (과업을 달성하면 뭔가 꼭 생산하기 때문에 ‘생산소설’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식 줄거리 전개가 일반적인 성장소설이나 모험소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근본적으로 소련 공산당 프로파간다의 도구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클라크는 또한 같은 연구서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 생산소설의 중심이 되는 ‘건설’에 대한 집착에 깔린 이유와 목적을 ‘기계와 정원’으로 정리했다. 즉 ‘기계’로 상징되는 발달된 과학기술과 지식을 통해 지구와 자연을 인간의 편의에 맞는 온화하고 보기 좋은 ‘정원’으로 재구성, 재형상화하는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묘사되는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자연과의 투쟁이 끊임없이 언급되고 작가가 기후변화, 지구 온난화, 극지방의 빙하나 만년설 소멸과 주요 바다들의 해수면 상승을 유토피아 완성을 위한 긍정적인 과정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의 파괴를 ‘발전’으로 포장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회도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이지만 공산주의에서는 그 기저에 깔린 철학과 사고방식 자체가 자연의 변형을 역사발전의 필수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환경파괴에 대한 자각이나 규제 없이 좀 더 무분별한 측면이 있었다.
어찌 됐든 《안드로메다 성운》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기만 했다면 뛰어난 현대 러시아 SF의 반열에 오르기는커녕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버려져 잊혀버렸을 것이다. 예프레모프는 앞서 말했듯이 붉은 군대의 피양육자로 어린 시절을 보낸 ‘혁명의 아들’이며 스탈린이 1927년 공식적으로 집권하여 제1차 5개년계획을 시작한 1928년에 스무 살 성년을 맞이한 소련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작품, 그것도 대표작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요소들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과나 업적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악역을 맡은 천문학자 푸르 히스의 묘사 등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요소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안드로메다 성운》에서는 위에 나열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을 등장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성격에 맞추어 변용한다. 그리하여 성단탐사라는 과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영웅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멘토인 에르그 선장이 아니라 여성이며 젊은 초임 항해사인 니자이다. 므벤이 티베트 관측소에서 비밀 실험을 진행했다가 사상자를 발생시킨 이유는 부패한 관료주의자들의 음모 때문이 아니라 실험 자체가 내포한 위험성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본인의 조급한 열망 때문이며, 그 결과 므벤은 인민재판에 처해지거나 헌신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속죄하는 대신 아름다운 무용수 차라와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웅대한 우주여행을 묘사한 이 장편 소설이 356쪽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등장인물 중 누군가 제대로 손을 잡고 키스했다는 사실에 역자는 기쁨과 한탄을 금할 수 없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예프레모프는 소련 사람으로서 공산주의를 신봉했고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 사회’ 혹은 ‘유토피아’와 동의어로 사용했으나, 현대 러시아 문학에 족적을 남긴 훌륭한 작가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당대 소비에트 정권의 입맛에 항상 맞는 작품만 쓴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예프레모프가 1972년 10월 5일에 사망하고 나서 한 달 뒤인 11월 4일에 KGB가 그의 아파트에 들이닥쳐 집을 샅샅이 수색하고 모든 원고를 압수한다. 이후 8년간 예프레모프는 출간을 금지당했고 소련 문학계는 물론 고고학과 생물학계에서도 입에 올릴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획일적인 통제와 억압의 시대에 예술가로서 출간금지조치 등의 탄압을 당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예술적 완성도와 창조력의 깊이를 반증해준다. 예프레모프가 다른 많은 소련 작가들처럼 살아서 고통당하지 않고 사후에 출간 금지를 당했다는 사실이 작가 본인을 위해서는 다행이었을 거라고 조금은 씁쓸하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