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초기 걸작 10편, 전면 개정 출간!
데뷔작 <촉각의 경험>에서부터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까지,
오래도록 한국의 SF에는 김보영이 빛나고 있었다
김보영의 소설은 이미 그 자체로 숨막히게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다.
- 봉준호, 영화감독
김보영은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이다.
- 문목하, 소설가
한국 SF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김보영 초기 걸작 10편을 드디어 다시 만난다!
오래도록 한국의 SF에는 김보영이 빛나고 있었다
2010년 김보영의 소설집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가 처음 나왔을 때, 소설가 박민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왕의 등극이다. 김보영의 작품들이 언젠가 한국 SF의 ‘종의 기원’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로부터 10년 뒤, 김보영은 한국 SF 작가로서는 최초로 미국 최대 출판사 하퍼 콜린스에서 영문 단편집을 출간했고, 또 다른 영문 단편집으로는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를 두고 여러 SF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한국 SF 사에서 전설로 남을 것”이라고 평했고, 그 예언은 모두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두 책은 안타깝게도 절판되어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반갑게도 수록작 중 <미래로 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몇 편이 재출간되어 독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SF의 기원”으로 일컬어질 작품들을 독자들이 쉽게 만나보기 어렵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다.
12년 만에 복간되는 김보영 소설집 《다섯 번째 감각》에는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 중 따로 출간된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과, 후속편을 집필해 장편으로 준비 중인 <종의 기원> 연작, 그래픽 노블로 나오게 될 <진화신화>, 그리고 《얼마나 닮았는가》에 수록된 <0과 1 사이>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수록되었다. 데뷔작이자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대상을 받은 <촉각의 경험>에서부터 한국 SF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될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까지, 오래도록 한국의 SF에서 빛나고 있었던 김보영의 초기 걸작들을 다시 만나보자.
훌륭한 반전을 만드는 건 과정과 논리의 아름다움이다
한국 SF 작품들을 모은 영어 번역 단편집 《레디메이드 보살》이 나왔을 때,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영어권 비평가들과 독자들이, 이 이야기들이 한국어를 쓰는 한국 사람들이 나오는 한국 이야기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우리로서는 그 놀라움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다. 심지어 번역서를 읽을 때도 그 나라와 문화와 언어의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그 편협함.
하지만 비영어권 SF 작가들이 자신의 미래를 읽지 못하는 건 의외로 흔한 일이다. 특히 우주개발이 미소 두 강대국에 의해 독점되어 왔던 20세기 후반이 그랬다. 그때는 외계인이 와도 백악관 앞마당에 착륙할 것 같았고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주연이 아니었고 주연이 되기 위해서는 강대국 주변에 머물러야 했다. 우주로 나가기 위해 소련과 미국의 우주선에 탑승해야 했던 한낙원의 《금성탐험대》가 그러했듯.
반대로 보면 한국 배경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워진 건 20세기의 기술독점이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다양해졌고 그 안에서 우리가 주인공인 건 자연스러웠다. 더 이상 한국 이름을 쓰며 민망해하거나 수줍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김보영의 세계는 이 흐름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그 때문에 작가의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종종 적응에 애를 먹는다.
<땅 밑에>의 다음 문장을 보자. “아내가 찌개를 들고 와서 조용히 상에 앉았다. 아내는 의자에 앉아 내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그 앞에 민석과 윤형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니 우리는 주인공이 당연히 가부장적인 21세기 초 한국문화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없는 지하미로가 백 년 전쯤에 발견되지 않았냐고? 그 뒤에 작가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와 그곳의 역사를 조금 더 상세하게 묘사한다. “나는 세상이 둥글다는 것도 안다. (…) 옛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세상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들은 세상의 반대쪽에서는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려 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제 독자들은 지하미로를 따라 땅 밑으로 계속 내려가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우리가 사는 한국, 아니,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 이야기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조던의 아이들》과 브라이언 W. 올디스의 《논스탑》의 전통을 잇는 SF 모험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읽는 동안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표준적인 아파트 안인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막 끓인 찌개를 상에 가져다 놓는 한국 여자의 모습이 대놓고 드러나 있어 장르 설정을 온전하게 읽는 것을 방해한다.
이를 넘어선다면? 해방감이 기다린다. 우리 세계와 허구 세계와의 연속성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을 다른 어딘가에 두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세계의 주인공이다. 번역을 통해 김보영의 작품들을 읽는 해외 독자들이 이 해방감을 얼마나 이해할지 종종 궁금해진다. 이들은 이 당연함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것이 일부러 낯선 세계에서 시작하며 독자들을 낯설게 하는 효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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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상적인 세계의 설정은 중요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상당수는 우리가 당연한 정상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뒤집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다섯 번째 감각>이다. <땅 밑에>보다 더 시치미를 뚝 떼고 현대 한국의 일상공간인 척하는 공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교통사고로 죽은 언니와 관련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동생의 추적담이다.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통했다면 우린 이 세계가 우리가 사는 곳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경우, 이를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시청각 정보와는 달리 언어는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정보를 훨씬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이 세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인인 곳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수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제목의 <다섯 번째 감각>은 청각이다. 그리고 귀가 들리기 시작한 주인공에게 음악과 소리는 거의 코스믹 호러스러운 공포와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아닌 척 시치미 뚝 떼고 열린 뒤집힌 세계가 장엄한 팡파르와 함께 다시 뒤집힌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 된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처음부터 설명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외지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웰스의 이야기는 김보영의 이야기가 주는 새로움과 충격이 없다.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는가는 이렇게 중요하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역시 뒤집힘의 이야기다. 이 단편은 어느 정도 패를 까고 시작한다. 소설 속 사람들이 특수기면증이라고 부르는 증상이 ‘잠’이라는 것, 이 세계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소수라는 사실을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가 만들어지므로 여기서 멈추어도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 뒤집힌 세계의 경계선을 조금씩 넓혀간다. 그리고 그 팽창의 속도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엄청난 속도로 가속된다. 한 사람의 증상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은하계 전체로 넓어지면서 끝이 난다. 이 세계의 작은 지역은 낸시 크레스가 (<스페인의 거지들>), 큰 지역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나이트폴》) 한 번씩 거쳐 갔다. 하지만 이들을 하나의 곡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혀 새로운 경이의 무대가 열린다.
<우수한 유전자>, <스크립터>는 이 뒤집음을 반전으로 이용한다. <우수한 유전자>의 경우는 제목만 봐도 그 반전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장르 동네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제목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쓰지 않기 때문에. 대놓고 주제를 알리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가 이 이야기에 반전이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이런 뒤집힘의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무시 못 할 정도로 많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크립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혹시나 실수로라도 작품을 읽지 않고 여기로 들어온 독자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반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포일러가 아니냐고? 어떤 사람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훌륭한 반전을 만드는 건 과정과 논리의 아름다움이다. <스크립터>의 반전은 갑작스럽게 놀라움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가 완결되는 순간에 가깝다. 그 결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기며 따라간 발견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 완벽하게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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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독자에게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장르라고 한다. 하지만 외계문명, 우주여행, 시간여행, 가상현실, 거대인공지능과 같은 SF의 익숙한 재료들은 이제 그 자체로는 어떤 신선한 충격을 주지 않는다. 장르를 통해 너무 많이 이야기되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클리셰화되었기 때문에. 클리셰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보수화되고 독자들은 이에 안주한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우주전쟁》에서 호전적인 화성인을 등장시켰을 때 그것은 서구제국주의 시스템에 편안하게 안주한 영국인들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러브크래프트와 친구들이 절대적인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 만든 코스믹 호러의 설정이 지금도 같은 충격을 주는가? 모든 것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달렸다.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정보를 풀고 이를 우리가 사는 세계와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김보영의 월드 빌딩은 익숙한 장르 공식을 답습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개안의 과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모든 익숙한 것들은 그 여정을 통해 낯설어지고 성, 음악. 문명, 생물학적 조건은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다. 세상은 원래부터 기괴하고 무섭고 아름답고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우리는 두꺼운 습관의 담요를 뒤집어 쓰고 이를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김보영의 단편들을 읽는 것은 그 담요를 은근슬쩍 떨구는 과정이다.
― 듀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