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참으려고만 할까? -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감정 조절 심리학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저 너머를 향하여,
날마다 한 걸음씩 과학하는 마음으로
하루 평균 14시간을 근무하고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을 받으며, 심지어 그마저 정규직이 아니어서 늘 미래에 대한 고용 불안감을 안고 있다. 이들 중에서 처지가 좋은 경우에는 휴일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지만, 주말은커녕 명절 연휴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수. 이들이 하는 일에 대해 남들이 알아주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그딴 걸 해서 뭐 해?” 소리를 듣는 일도 다반사다. 바로 우리나라 생명과학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혹은 전생에 큰 잘못을 저질러 이 생에 과학자로 태어나버린 ‘연구 노예’들의 이야기이거나.
이 책의 저자 김준은 서울대학교 기초과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으로, 이공계에서 가장 취직 안 되기로 유명하다는 생명과학, 그중에서도 세상 쓸모없다고 천대받는 ‘선충’의 유전자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별수 없는 연구 노예”라고 자조하지만, 사실은 2019년 6월 첫 번째 제1저자 연구논문이 국제 학술지 <게놈 리서치(Genome Research)> 표지논문으로 선정되었고, 2020년 2월에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최우수박사학위논문상을 수상했으며, 2021년 6월에는 두 번째 제1저자 겸 교신저자 연구논문도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뉴클레익 애시드 리서치(Nucleic Acids Research)>에 연이어 실린 매우 전도유망한 젊은 과학자다.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그의 앞길에는 빛나는 꽃길만 펼쳐져 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다른 수많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처럼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는 틈틈이 채용 정보 웹사이트를 새로고침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젊은 과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꿈꿀 ‘안정적인 연구직’은 그에게도 역시 하늘의 별 따기인 까닭이다.
“게임을 하고 있다. (…) 난이도는 또 어찌나 높은지, 악착같이 재료를 모아도 변변찮은 장비 하나 얻어내기 쉽지 않은 괴상한 게임이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경쟁은 또 매우 치열해서 장비를 어지간히 갖춰서는 승급전에 발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다. 피, 땀, 눈물 흘려가며 간신히 온갖 장비를 다 챙기고 나면, 이제는 ‘연구직 직장 획득’이라는 승급전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때까지 무겁게 쌓아올린 장비들을 어깨에 이고,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운이 아주 안 좋으면 이렇게 걷고 또 걷다가 장비는 낡아가고 체력은 모두 소모되어 그대로 게임이 종료되는 수도 있다. 이 게임의 이름은 ‘과학자로 살아남기’. 나는 생명과학 서버에서, 이제 막 대학원생 퀘스트를 끝마치고 박사가 됐다.” / 205~206쪽
하는 짓도, 생김새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예쁜꼬마선충’
이런 게 재미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 생은 글렀다
연구나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어조는 줄곧 밝고 경쾌하다. 비록 밤잠을 설치고 코피를 쏟아가며 실험을 할지언정, 또 같은 꿈을 꾸었던 학부 동기와 선후배들이 현실을 깨닫고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떠나갈지언정, 끝내 과학자라는 오랜 꿈을 지키기로 한 저자에게 과학이란 언제까지나 그의 인생의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첫 장에서부터 ‘전생에 잘못을 저질러 결국 과학자라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모두 귀여운 투정으로 느껴질 정도로 책의 페이지마다 온통 과학을 향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이 책은 과학자의 에세이임에도 온갖 생물들 이야기가 책의 곳곳에 등장하며, 에세이에서 신기한 생물들 이야기로, 다시 쉽게 이해하는 생명과학 이야기로 장르를 넘나든다. 특히 저자의 주요 연구 생물인 ‘예쁜꼬마선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딴 거 연구해서 뭐 해? 그럴 돈 있으면 암이나 연구해!”라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바로 그 생물이기에 저자가 예쁜꼬마선충의 설명에 들이는 공은 아주 정성스럽다.
“선충, 귀여운 이눔시키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잘 살고, 종류도 매우 다양한 게 특징이다. 예쁜꼬마선충은 보통 1밀리미터 남짓한 크기이지만, 어떤 선충은 몸 길이가 무려 1미터에 이를 정도로 길쭉해서 돌돌 말면 컵라면처럼 보일 정도다. 머리 쪽엔 눈이나 코는 없고 주둥이만 있는데, 주둥이 모양도 뭉뚝한 녀석부터 국화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난 녀석들까지 아주 다채롭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눈이 없어도 빛을 감지할 수 있고, 코가 없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거다. 예쁜꼬마선충은 고작해야 300여 개의 신경세포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신경세포를 최대로 활용해서 빛도 느끼고 냄새도 맡고 천적을 감지해서 도망치는 등 알뜰하게 기능을 나눠 쓴다.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 144~145쪽
일단 시도해보기 전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생도 그렇듯, 과학도 그렇다
예쁜꼬마선충은 실처럼 길쭉하게 생긴 아주 작고 단순한 생물로, 언뜻 생각하면 인간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과 예쁜꼬마선충의 유전자는 무려 70~80퍼센트가량이 동일해서, 인간을 상대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유전자 조작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고마운 대상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드니 브레너와 로버트 호비츠, 존 설스턴은 2002년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한 연구로 ‘세포 사멸’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밝혀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2003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간 게놈 프로젝트(인간 유전체 지도 분석 사업)’ 성공의 밑바탕에도 예쁜꼬마선충 연구가 있었다. 인간 게놈을 밝히기 위한 연습문제로서 예쁜꼬마선충 게놈 지도를 먼저 작성해 성공의 경험을 쌓았던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쁜꼬마선충 연구를 비롯한 ‘쓸모없는 연구’들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바꿀 중요한 연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우리나라의 연구 지원 체계 아래에서는 경제적, 산업적 이익으로 직결되지 않는 기초과학 연구의 설 자리가 아직도 부족한 상황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꾸준히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할 기반을 쌓아왔고, 시료를 모으고 연구자를 훈련시키면서 실현 가능한 연구들을 수행해본 경험도 출중하다. 심지어 수백억 원이 들어가는 연구라 해도, 연구비를 투자하면 어떤 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공감대가 마련되어 있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이 같은 인식과 경험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아직 해본 적 없는 연구에 대하여 “몇억만 씁시다!” 하고 요청해봐야 “그런 연구를 할 자격이 되시나요?” “그런 연구를 할 능력은 있으신가요?” “그런 연구에 그 큰돈을 써서 뭘 얻을 수 있나요?” 요런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이 연구가 충분히 가능하고 돈을 쓸 가치가 있다는 게 납득이 될 텐데, 보통은 그렇지가 않으니 일단 설득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설득하는 데 몇 년을 보내고 나면, 그 사이에 다른 나라에서 먼저 좋은 연구 성과를 내버린다. 그걸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뒤늦게 “이게 되네?” 하고 연구에 투자하려고 할 때쯤이면 그 연구는 이제 가치를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 62~63쪽
“오늘도 쓸모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현미경 속 생명체에서
인류를 구원할 유용함을 발견해내는 경이로움에 관하여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사랑해 마지 않는 다양한 생물 연구들이 우리 사회의 경제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대받는 상황을 유쾌하게 반박하는 이야기다. 또한 오직 과학이 좋아서 불투명한 미래와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쓸모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이들, 기초과학에 몸담은 젊은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당부이기도 하다.
저자는 연구란 “비록 지금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게끔” 준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답을 찾을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라 할지라도 이러한 연구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인류의 지식의 한계를 한 뼘 더 확장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그러한 인식과 공감대가 우리 사회에 형성되기를 기원한다.
“인생도 그렇듯 해보기 전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 과학 연구에서는 더욱 그렇다. (…) 비록 지금은 쓸모없다고 손가락질받는 것들이 어쩌면 지식의 한계를 부술 결정적인 연구가 될 수도 있다. 인류가 오랫동안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정답은 아마도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저 너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