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만나는 한국신화
익숙하지만 낯선 한국 신화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로의 초대
누군가의 창조가 아닌 하늘과 땅이 저절로 떨어져 만들어진 세계, 노래에서 탄생한 인간, 대결의 끝은 언제나 꽃 피우기 내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인물들, 세상의 끝 저승에 펼쳐진 꽃밭…. 살짝만 들여다봐도 한국 신화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대별왕과 소별왕, 삼승할망과 저승할망, 성주신, 조왕신, 자청비, 바리공주, 강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지만 그들의 행방을 아는 이는 드물다.
혹여나 관심이 생겨 읽어 보려 해도 아이들을 위한 옛이야기 책이거나 연구자를 위한 책뿐인 것 같아 부담스럽다. 이 책은 일반적인 교양 독자의 눈높이에서 한국 신화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세계 여러 신화를 섭렵한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신화 속 상징에 대한 탁월한 해설과 함께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만나 보자.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선과 악,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는 곳, 한국 신화의 세계
한국 신화의 주인공들은 수시로 죽음을 넘나든다. 웹툰과 동명의 영화 〈신과 함께〉, 만화 〈신비아파트〉에서도 각색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강림은 본래 이승의 관장이었다. 그는 원님의 명을 받고 염라대왕을 잡기 위해 저승으로 떠난다. 부모의 병을 고칠 약을 찾기 위해 떠난 바리데기 역시 저승을 향한다. 산 사람이 저승에 다녀오는 것은 물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도 흔하다. 삶과 죽음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한국 신화의 신은 본래 인간인 경우가 많다. 아이를 점지해 주는 삼승할망도 풍요의 신 자청비도 운명의 신 가믄장아기도 본디 인간이었다. 선악의 구분 역시 희미하다. 생불왕의 지위를 놓고 다투던 명진국따님과 동해용왕의 딸은 각자에게 삼승할망과 저승할망의 역할이 주어지자 이별주를 나누어 마시고 헤어진다. 훗날 조왕신이 되는 여산부인을 죽인 노일제대귀일의 딸조차 화장실의 신 측신의 지위에 올려놓는 게 한국 신화의 세계관이다. 이처럼 한국 신화에서는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선과 악,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다.
대결은 언제나 꽃 피우기 내기로
세상의 끝, 저승에 펼쳐진 꽃밭
꽃과 꽃밭, 저승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한국 신화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상징물은 꽃과 꽃밭이다. 천지왕의 아들 대별왕, 소별왕 쌍둥이는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꽃 피우기 내기를 벌인다. 함경도에서 전해지는 창조 신화 〈창세가〉 속 미륵과 석가도 세상을 다스릴 사람을 가리기 위한 대결로 꽃 피우기 내기를 벌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산신(産神) 생불왕을 가리는 심판 역시 꽃 피우기 내기로 이루어지고, 부모의 병을 고칠 약을 찾으러 서천서역국에 가는 바리데기는 역경을 이겨 낸 징표로 꽃을 받는다. 꽃은 그 화려함에서 엿볼 수 있듯 생명을 뜻하며 동시에 그것의 연장인 아름다운 삶을 상징한다.
흥미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을 상징하는 꽃이 모인 꽃밭이 저승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끝, 서천서역국에는 수많은 꽃이 자란다. 사람을 살리는 뼈살이꽃, 살살이꽃, 숨살이꽃을 비롯해 아이를 점지하는 생불꽃, 모든 것을 죽이는 멸망꽃 등 저마다 능력을 지닌 꽃들이 모여 거대한 서천꽃밭을 이룬다.
저승은 죽음의 공간이다. 다시 말해 저승은 삶에서 벗어난 장소로,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을 극대화한 것이다. 따라서 저승에 꽃이 있고 꽃밭이 있다는 설정은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와 미덕이 지배자와 인간으로 표상되는 중심이 아닌 백성과 자연 같은 주변에 있음을 의미한다.
경계의 시대에서 관계의 시대로,
중심이 아닌 주변을 응시하는 한국 신화의 가치
우리가 직면한 현대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다. 기술의 발달로 국가 간 경계는 물론 산업 간, 학문 간, 젠더, 종, 생산과 소비 등 다양한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물어진 경계에서 맺는 새로운 관계일 것이다. 자연을 비롯하여 주변으로 치환되던 것들과 새로운 관계 맺기가 지금 이 시대에는 필요하다.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오늘날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21세기 들어 인류가 맞닥뜨린 전염병이나 기후위기 같은 다양한 문제는 지금까지 세상을 지탱해 온 가치와 미덕을 흔들고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이미 많은 사상가들이 ‘관계’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권하고 있다. 명확한 이분법보다는 느슨한 경계를 가진, 중심이 아닌 주변을 응시하는 한국 신화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시선을 선사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과 꿈이 담겨 있는 한국 신화를 읽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