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으로 - 여말선초, 단절인가 계승인가
조선왕조의 개창 이전과 이후에 정치·사회·경제 각 측면에서 뚜렷한 질적 차이가 나타났는지에 대한 실증적 검토는 기존의 발전론적 역사 인식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동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당대의 관찬 사료들에 보이는 조선왕조 개창 세력의 역사 인식에서 한 발짝 벗어난다면, 조선왕조의 개창을 ‘과거와의 단절’ 혹은 ‘미래로의 발전’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연속’과 ‘계승’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다.
새 시대, 새 이념, 새로운 정치 세력, 새로운 제도 운영?
조선왕조 개창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500년 역사를 열어젖힌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우리는 조선왕조 개창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다. 한국사학계가 이루어낸 연구 성과 덕분이다.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세력을 형성한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 부패한 권문세족을 제압하고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나아가 급진파 사대부는 온건파 사대부 등 다른 정치 세력과 차별화되는 성리학 사상 체계를 가지고 개혁을 추진했다.
조선 건국은 국가 통치와 제도 운영 면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창출했다. 고려의 주현-속현 제도가 소멸하고 중앙집권의 군현제가 갖춰진 것이다. 국가 수입을 증대시켜 조선 건국의 물적 기반을 마련한 토지개혁도 조선왕조 개창의 역사적 의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외교와 국제 관계는 어떠한가? 100여 년에 걸친 몽골(원) 복속기를 끊어내고 명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 속에 조선을 자리매김했고, 또한 명으로부터 관복을 받고 역서를 반사받음으로써 보편 문화를 수용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갖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이미지는 유교 사회의 발전이며, ‘숭유억불’이다. 바야흐로 유불 교체를 통해 유교국가 조선을 탄생시킨 것이다.
위의 설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왕조 개창이 갖는 역사적 의미이다. 이는 이른바 ‘민족발전사관’ 혹은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조선왕조 개창의 역사적 의미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발전론적 관점에서는 조선왕조의 개창이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발전의 큰 성취를 이룬 시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조선왕조의 개창 이전과 이후에 정치·사회·경제 각 측면에서 뚜렷한 질적 차이가 나타났는가?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조선왕조 개창 세력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래야만 당시의 역사상을 제대로 복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개창을 ‘발전’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변화’나 ‘차이’, ‘연속’이나 ‘계승’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왕조 교체를 보는 새로운 시선 1
: 정치 세력의 변화, 그리고 학문·사상의 분기
한국사학계의 기존 통설에 따르면 고려 말 신유학을 수용한 지방의 재지사족은 신진사대부로 성장하고, 이후 조선시대 사림 세력의 근간이 된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개창은 권문세족에 대한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승리의 결과물로 간단히 압축된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면 권문세족과 훈구파는 수구적인 존재이며, 신진사대부와 사림은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존재로 이분화된다. 나아가 신진사대부와 사림을 배출해낸 향촌 사회는 유교 질서를 구현한 선진적인 공간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01장: 지배세력의 변동과 유교화」의 필자 송웅섭은 이와 같은 시각을 비판한다. 필자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굉장히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6세기 초반까지도 일부 백성에게는 생소했던 유교 윤리>
16세기 초 황해도 연안에 사는 이동이라는 사람이 감영에 잡혀 왔다. 죄목은 부친에게 상해를 입힌 상해죄! 황해도 관찰사 김정국은 그를 엄벌에 처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동에게서 들은 뜻밖의 답변은 관찰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평소 아버지와 자주 말다툼을 벌였으며, 다툴 때면 욕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때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때려서는 안 되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위 에피소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향촌 사회의 실상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향촌 사회는 유교적 가치와 풍속이 선진적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까닭이다. 여말선초에 이미 생산력 발전과 향촌 사회를 주도했던 사회 세력, 곧 신진사대부의 성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보급하며 정착시켰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에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정착’이란 성리학에 해박하고 뛰어난 학식을 갖춘 몇몇 인사가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신앙 등의 각종 음사를 자발적으로 배척해 나가는 동시에, 그것을 유교적 의례들로 대체해 나가는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또한 향촌 사회상이 과도하게 의미 부여되고 선진적으로 그려짐으로써 지방 출신들이 개혁적 정치 세력으로 상정되었다고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권문세족 vs 신진사대부’나 ‘훈구파 vs 사림파’ 구도처럼 이분법적으로 정치 세력을 양분하는 인식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조선왕조 개창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상사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또 하나는 바로 성리학의 수용이다. 고려 말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노선 차이로 인해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나뉘었는데, 기존 연구는 그들의 정치적 분기를 학문적·사상적 분기로까지 확대하여 설명한다. 「02장: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의 필자 강문식은 고려 말 사대부의 두 세력이 서로 다른 학문적 지향을 지녔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원으로부터 수용하여 관학으로 수렴된 성리학의 다양한 내용을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가운데 각자의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기반 등의 차이에 따라 강조하는 내용이 달라졌다. 나아가 16세기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갈등 문제를 양측의 사상적 갈등으로 해석하는 데도 반대한다. 16세기 성리학은 여말선초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심화된 연구를 통해 이해의 수준을 높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연속적이며, 계기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다고 보는 입장이다.
왕조 교체를 보는 새로운 시선 2
: 명에 요청하여 하사받은 관복, 그것에 드러난 문화적 지향
전근대 유교 사회의 복식은 생활문화이자 예(禮)의 표현이었고, 정치적·사회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을 정도로 그 안에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다. 「11장: 관복제의 변화와 문화적 지향」에서는 여말선초의 다양한 관복 변화를 통해 당대의 문화적 지향을 살펴본다.
외교, 정치, 사상의 상징물인 관복은 어떻게 정비되어왔을까? 학계에서는 고려 공민왕대에 명과 외교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명의 관복제가 수용되었다고 본다. 과연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원 중심에서 명 중심으로 전환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기존의 복식 문화는 모두 배척되고 새로운 복식 문화가 형성되었을까?
이 글에 따르면, 고려는 전통적으로 후주와 송의 제도를 바탕으로 요·금의 복제를 수용하여 관복제를 운용했으나, 몽골(원)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몽골을 문화의 중심인 중화로 인식하고 몽골풍 관복제를 도입했다. 원 문화의 영향력으로 고려는 문화의 중심으로서 ‘중화’가 지니는 위치를 실감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4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의 풍속을 재기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고, 명의 문화에 주목했다. 이제 명을 새로운 문화의 중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 건국된 조선은 명의 관복제를 수용하여 복제를 마련하고 각종 예제를 구축해 나가며 자신들의 풍속을 회복할 수 있는 표본으로 여겼다. 요컨대 몽골(원)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 집권층이 상정했던 보편 문화의 적용이 명과의 관계 속에서 조선의 집권층에게 그대로 계승된 결과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인물 초상화를 통해 관복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이 글에서 느낄 수 있는 흥미로움 중 하나이다.
시기구분의 중요한 기점은?
몽골 복속이 변동의 중요한 계기
일반적으로 한국사 시대구분에서 조선왕조 개창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중세, 그 이후를 근세로 설정한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조선왕조 개창이 시기구분의 중요한 기점이라는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고려의 몽골 복속이 사회변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몽골 복속을 기준으로 중세와 근세를 구분하는 설정은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경제·사상 등 많은 부분에서 이루어진 개혁이 이미 고려 후기 이래로 진행되어왔던 변동과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부각한다. 즉,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를 시대적 연속선상에 놓고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 책의 집필진
강문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관
김용태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교수
김윤정 서울시립대학교 박사후연구원
박진훈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서은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소순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손성필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송웅섭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양혜원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이규철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이명미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이민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정동훈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조교수
정요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
최봉준 한림대학교 강사
최종석 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