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의 철학
물질적 풍요와 소비가 성공의 척도가 되는 세상에서
단순한 삶의 실천적 가능성을 묻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자유의 규모를 늘리기로 한, 아파트와 도시를 떠나 멀고 불편함을 선택한 이들이 있다. 물질적 풍요와 소비가 개인적 성취능력의 표본으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돈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자발적으로’ 멈추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하나의 흐름이 된 것처럼 삶을 축소하고 적게 일하기, 느리게 살기, 전원에서 자급자족하기, 내면의 가치에 집중하기 등 단순한 삶의 가치와 양식을 동경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대부분의 언론 매체도 이에 긍정적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박함보다는 고급스러움에서, 비움보다는 채움을 통해 더 큰 행복을 얻는다.
현대는 그야말로 방향상실의 시대다. 소유의 욕망이 풍요롭고 안락한 삶에 필요한 요소로 인정받는 동시에 인간성과 도덕성을 타락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며, 그 간극 사이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누적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삶이 언젠가 자신도 추구하고픈 삶의 목표가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있는 자의 여유쯤으로, 때로는 과시적 행동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함의 가치가 경제를 위축시키는 위험요소이다. 다양한 삶의 가치와 무게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삶이 과연 삶의 모범이 될 수 있을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
《단순한 삶의 철학》은 단순한 삶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숙고하며 오늘날 바람직한 삶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책이다. 소크라테스부터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수많은 사상가와 현인 들이 단순한 삶의 가치를 칭송하고 설파했지만, 이들의 사상이 대중을 설득하는 데 왜 실패했는지, 풍요로운 생활을 저버리고 검소하게 사는 것만이 여전히 올바른 삶인지, 현대 사회가 어떻게 모순된 교훈을 장려했는지 등 단순한 삶과 부의 추구라는 상반된 두 가치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을 이끌며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어떤 선택이 더 행복한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자극한다.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Emrys Westacott은 뉴욕 알프레드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다양한 전통과 학파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지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삶의 궁극적 가치와 미덕을 소박함과 단순함에 두고 있다. 《구두쇠 신문》의 열혈 독자로 빈 우유팩으로 변기 청소솔 거치대를 만들어 사용할 만큼 지독한 구두쇠로 통한다. 그런 그도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어떠한 삶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 신중한 입장을 취하며, 최근 이상적으로만 조명되어온 단순한 삶의 실천적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사람들마다 형편과 사정이 다르고, 어떤 삶을 사느냐는 개개인의 선택이자 가치의 문제이다. 다만, 철학, 종교학, 문학, 예술,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등의 분야를 교차하며 단순한 삶에 관한 견해가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 2000여 년간의 지적 변혁의 흐름을 추적하는 저자의 논조를 함께 따라가다 보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적정한 삶의 대안을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로, 저자가 2002년부터 진행해온 ‘1달러로 만드는 하루의 행복Tightwaddery: The Good Life on a Dollar a Day’이라는 강의가 이 책의 모태가 되었다. 단순한 삶의 가치를 두고 첨예한 철학적 논쟁을 이끄는 토론수업과 더불어 학생들끼리 서로 머리를 잘라주게 하는 등 검약의 의미를 직접 실행해보도록 하는 실습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 강의는 2008년 스탠퍼드대학교가 선정한 ‘가장 기발한 강의 25’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덜한 것이 더 낫다’ : 단순한 삶의 철학적 성찰
어느 학파나 어느 종교에서든 철학자, 작가, 사상가라는 수많은 현인들이 소박함과 단순한 삶의 가치를 칭송해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소박함과 단순한 삶 자체가 도덕적이며 인간의 덕성을 길러준다고 보았고, 다른 바람직한 덕목들과도 연관성을 가지며, 궁극적으로 행복으로 가는 길을 닦아준다고 믿었다. 소박함과 단순함을 옹호하는 주요 주장들은 그와 대립되는 호화와 사치를 비판하는 논쟁으로 이어지곤 했고, 심지어 사적인 소유 자체를 문제 삼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단순한 삶을 엄격히 실천했던 국가 가운데 스파르타를 빼놓을 수 없다. 스파르타는 부에 무관심하도록 소박함을 사회 전체를 이끄는 원칙으로 삼았는데, 음식에 있어서도 예외는 없었다. 그들에게 자주 배식되던 돼지고기와 선지, 식초, 소금을 넣어 만든 ‘검은 죽’은 현재까지도 맛없기로 악명이 자자한데, 이마저도 배급량이 적었다고 한다. 이처럼 음식이 수수한 것도 뭐든 기꺼이 먹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이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본 이방인들은 “왜 스파르타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가를 이끄는 자는 그 어떤 재산도, 지위도 부여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상국가의 조건을 스파르타에서 찾았다. 스파르타의 가옥과 의복, 음식 그리고 도덕적인 태도에 배어 있는 단순함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또한 그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정직함의 증거로 가난한 삶을 매우 상세히 설명했다.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플라톤은 스승의 단순한 삶이 다른 무엇보다 덕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면모를 부각한다고 본 것이다. 한편 에피쿠로스는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대중을 현혹시키지 않고는 돈을 벌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 모든 관계를 끊고 속박에서 벗어나는 삶이 진정한 자유임을 강조했다.
플라톤이나 에피쿠로스보다 극단적으로 단순한 삶을 보여준 디오게네스는 커다란 항아리나 통을 거처로 삼으며 몸에 두른 망토를 이부자리로 사용하고, 음식은 보자기에 싸 가지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마음 가는 대로 행하며 궁핍을 관조했다고 한다. 한 아이가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진 물그릇을 던져버렸고, 깨진 그릇에 담긴 콩을 빵 껍질로 퍼 먹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숟가락마저 던져버렸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처럼 집과 옷, 음식에 있어 수수함을 추구했던 대다수의 고대 현인들은 소박한 삶이야말로 도덕적 무결함의 척도로 여겼고, 이러한 삶의 자세로 사유에 정진한다면 누구나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추구하고 발견한 진리는 단순한 삶과 전적으로 조화를 이뤘다.
‘많은 것이 더 낫다’ :
소박함의 철학은 왜 오늘날의 삶에서 어려운 것인가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회의적 입장을 보였다면, 18세기의 애덤 스미스는 이를 하나의 덕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개인이 한결같이 “그들의 헛되고 한없는 욕망을 불태운다면” 의도치 않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사회 전체에 이익이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환에 계기가 된 것은 데이비드 흄의 철학이다. 흄은 존재의 본질은 개인의 욕망과 의지, 열정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열정과 쾌락의 확실성으로 정의된 삶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가장 소박한 수준의 사치까지도 비난하는 극단적인 도덕론자들”을 비판하고, 소비주의에 대한 초기의 방어 논리를 제공했다. 특히 〈예술의 세련미〉라는 논문에서 그는 “상품의 증가와 소비는 삶에 광채를 더하고 즐거움을 제공해 사회에 이득이 되고, … 개인들에게 일하는 만족감을 배가시킨다”라고 하면서, 만약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없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게으름에 빠지고 삶의 즐거움을 잃게 된다. 이는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욕심이 경제성장을 이끌고 이로 인해 많은 공공의 이익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발견되는 탐욕이나 탐심에 대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초기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막스 베버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 인용하며 돈벌이를 장려하는 노동윤리와 사치를 비난하는 금욕적인 도덕관습이 함께 발전하는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초기 자본주의가 배태되는 토대가 되었고 분석한다. 이 조합이 자본의 축적을 이끌어냈고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이기심과 사치를 비판하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경제적 분별력을 갖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도 여전히 유효했다. 벤저민 플랭클린은 “빚을 지는 일은 슬픔을 짊어지는 일과도 같다”며 낭비와 사치의 위험을 경계했다. 19세기 지식인 사회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랠프 월도 에머슨도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소박하고 자족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월든 호숫가의 작은 오두막에 홀로 기거하며 자급자족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도시를 떠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단순하게 사는 삶이 왜 좋은 삶인지를 실존적으로 증명했다. 그들의 삶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삶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적한 시골에 별장을 두고, 산과 들에서 캠핑을 즐기며, 텃밭을 마련해 채소를 가꾸는 일이 선망이 대상이 되는 이유다.
이처럼 서로 다른 조류의 사상이 근대 이후 사회를 주도하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개인의 악덕으로 질타를 받던 가치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일약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공로를 재평가받기에 이르렀고, 욕망이 경제성장에 필요한 요소로 인정받는 동시에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삶을 그리워하다
“오늘날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빚진 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돈 버는 일에 몰두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경력을 쌓기 위해 복잡다단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일상을 견뎌나간다. 때문에 능력이 된다면, 혹은 능력이 허락하지 않아도, 필요하지 않은 온갖 종류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보려 한다. 보풀제거기, 제빵기, 각종 피규어 등 온갖 종류의 도구와 물건을 구입하지만 소박한 즐거움도 잠시다. (홧김에 구매하는 비용을 일컫는 시발비용, 인형 뽑기 및 한정판 굿즈 구매 등 소소하게 낭비하는 재미로 돈을 쓰는 탕진잼 등이 2017년 소비 신조어로 꼽혔다고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경제 성장과 기술의 발전은 과거와 비교해 생활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을 가져다주었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모든 쾌락은 구입이 가능하다는 유혹은 현대인을 더 바쁜 삶으로 밀어 넣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 문화는 단순한 삶을 주장한 현인들의 이상과 자연히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단순함과 소박함의 매력을 떨어뜨린 그 요인이 다시금 단순한 삶의 이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소박하고 단조로운 평온한 시절에 대한 향수는 어느 사회나 만연한 시대적 현상이다. 부모들은 온종일 전자제품을 붙들고 지내는 아이들을 보며 밖에서 뛰어놀던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교사들은 예전 학생들은 얼마나 성실하고 예의가 발랐는지 추억하지 않던가. 심지어 2,500년 전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당대 삶의 비루한 모습을 태초의 “황금 종족”이 거닐던 “수고하고 상심하지 않아도…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곳과 비교하며 애통해했고, 세네카는 “목재를 네모반듯하게 자르면서” 인간의 행복이 ‘사치’에 의존하게 되었다며 “목수와 건축가가 없던” 완벽한 과거와 그 완벽함이 사라져버린 현재를 대비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고된 일상과 복잡한 인간관계, 삶에 대한 불안과 상실감 등은 이전의 단순했던 시절을 더욱 동경하게 하며, 이러한 갈망은 소유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느리게, 자족하는 삶으로 표출되었다.
삶의 규범으로서의 단순한 삶은 여전히 유효한가
단순한 삶에 제기되는 반론도 있다. 단순한 삶이 이미 경제적 안전망을 갖춘, 더 벌고 더 소비하는 삶의 양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효한 선택이란 점이다. 가령, 작은 오두막 짓기 열풍을 몰고 온 자크 클라인이나 비움으로써 행복을 채운다는 미니멀리즘의 권위자 조슈아 밀리번… 단순한 삶의 전도사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이들 대부분이 “한때 돈 버는 재주가 매우 출중했던 부자들”이었고 현재도 여전히 부유하다면? ‘악마의 맷돌’을 쉴 틈 없이 돌려야만 그나마 삶이 유지되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자발적 가난은 부자들의 덕일 뿐이라는 것인데, 단순한 삶에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반론이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현대 경제 시스템과 정부 정책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언급함(“공공정책이, 부자들이 그들의 세 번째, 네 번째 주택을 갖기 전에 가난한 이들이 첫 번째 집을 갖도록 보장해야만 한다!”)과 동시에 생존을 위협하는 빈곤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자발적 가난’에 익숙해졌다며, 실제로 미국의 많은 중산층마저 만족할 수 없는 욕망으로부터 심리적인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가능한 반론은 단순한 삶을 옹호하는 이들이 지금의 불공정한 경제체제를 순응하고 받아들이도록 효과적으로 독려한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한 예수의 발언도 착취와 불평등에 동조하는 의미로, 단순한 삶을 설파한 현인들의 가르침도 더 큰 파이 조각을 요구하지 말고 이미 가진 부스러기에 만족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저자는, 소박함과 단순한 삶의 철학을 설파한 스승들이 경계한 것은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탐욕과 소비주의였다고 강조한다.
이외에도 단순한 삶의 실천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치료제로서 단순한 삶의 유용성과 도덕적 가치를 제언하며, 오늘날 단순한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여러 객관적 변화가 있음을 지적한다. 먼저 단순한 삶은 복잡하지 않고 평온했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향수가 아니라, 실행가능하고 의미 있는 미래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삶의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에너지부족, 기후변화, 경기침체 등의 많은 문제들이 대두되면서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만 여겨졌던 단순한 삶이 인류 전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생활방식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고, 여기에 수십 년이 지나면서 단순함을 정의하는 방식도, 그것이 무엇에 반대하는가(가령 소유와 소비)가 아니라 무엇을 지향하는가(내면의 평온을 중시하며 생명을 아끼고 공감하는 것)를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 책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양식에 최종적인 대안을 마련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책을 꼼꼼하게 읽다 보면 범람하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개인과 사회, 자연의 상생을 모색하고자 하는 희망을 행간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