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사전 -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_우리에게는 작은 진리의 조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전’
홍한별 작가는 사전을 사랑한다. 어학사전이나 백과사전뿐만 아니라, 제목에 ‘사전’이나 ‘백과’라는 말이 들어간 책을 보면 혹해서 일단 모으고 본다. 끊임없이 단어를 고르고 써야 하는 번역가에게 사전은 꼭 필요한 도구이기도 하거니와 그 사전에 기대어 번역 일을 해오면서 무언가를 한 권에 집대성했다는 것,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조직화했다는 것의 위대함을 일찍이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홍한별 작가 역시 ‘사전’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자잘한 정보를 한데 모은 목록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특정 분야의 책을 번역할 때 인터넷에서 관련 용어집을 모두 찾아서 하나로 합해 자신만의 용어집을 만들기도 한다.
홍한별 작가에게 사전은 ‘검색을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사전은 ‘읽는’ 책이자 ‘노는’ 장소다. 각 단어와 함께 제시되는 예문과 용례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엮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전은 매우 혼란스러운 우주 속에서 순서를 깨닫게 해주는 안내자다. “광대한 우주를 우리는 인지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우리에게는 사전, 백과사전, 작은 진리의 조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이 알 수 없는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 무한에 가까운 단어들의 목록으로 쌓아올린 사전의 세계를 섬세하게 어루만진 『아무튼, 사전』은 ‘아무튼’ 시리즈 52번째 책이자 20년 경력의 출판 번역가 홍한별의 첫 단독 에세이다.
_네 사전을 믿지 말라
홍한별 작가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영한사전 사이트를 들락날락한다. 모르는 단어를 찾고 아는 단어도 다시 찾고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단어도 찾는다. 번역을 할 때는 영한사전을 비롯해 보통 열 개의 검색창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일한다. 번역하는 일의 절반은 단어 검색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사전을 믿지 말라’는 말을 자주 되새긴다. 사전은 ‘완전성’이라는 환상을 주지만 사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어떻게든 붙들어서 고정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아무리 방대한 사전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를 다 수록할 수는 없다. 단어는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전으로 옭아매려고 해도 우리가 쓰는 언어는 붙들어놓을 수가 없다.
『아무튼, 사전』에는 글을 쓰고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홍한별 작가가 사전을 닻줄 삼아 언어의 반경을 최대한 멀리 넓히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 실제로 쓰이면서 의미가 증폭되는, 새로운 맥락에 놓일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말’의 속성을 잘 알아보려는 노력이 이 책에 담겼다.
_그럼에도 사람들은 사전에 열정을, 삶을 바친다
네모지고 딱딱하고 두툼하고 무거운 물건으로서의 종이사전, 거기 담긴 단어들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점차 그것에 열정을, 삶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떠한 낱말을 최초로 정의하기 위해 사전에 올라가는 단어를 고르고 정의한 ‘말의 권위자’들과, 그 작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예문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목록을 만드는 일을 ‘수작업’으로 해낸 이름 모를 작업자들의 손길을 더듬는다.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영어 단어’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며 영어의 역사까지 성실히 기록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편찬자들과,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단어와 정의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으로 일본어의 세계를 넓힌 일본어 사전 편찬의 두 거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이 커져 결국 언어를 비롯한 가상의 나라 전체를 통째로 창조해버린 영국의 사기꾼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배움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으로 온갖 사전을 수집했던 작가의 아버지, 오래된 고향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수첩에 전라도 사투리를 모아 자신만의 사전을 만드는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누군가는 딱딱하고 따분하다 여겼을 사전으로 애호하는 세계를 쌓아올린 홍한별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비로소 깊이 이해하게 된다.
_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아무튼, 사전』은 혼자라는 느낌을 덜어주는 말의 힘, 사전의 힘을 보여준다. 나만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나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를 다른 사람들도 쓴다면, 심지어 그 단어가 사전에 올라 있다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다 생각하고 안심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구나 단어 하나가 애매했던 생각에 형태를 부여하거나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게 해주는 신기한 일을 종종 겪기도 한다. 불분명한 생각을 표현해주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설명해주고, 흔들리는 감정을 딱 집어 고정해주는 말들. 요즘 우리의 어휘 목록에 가스라이팅이나 맨스플레인 같은 단어가 새로이 들어오면서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듯한 경험을 한 것처럼.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고 홍한별 작가는 말한다. 더 많은 단어, 더 많은 사전은 우리를 덜 외롭게 하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고 더 많이 나아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