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딱따구리 - 이마저도 우리는 딱따구리를 좀 닮았다
아무튼 시리즈 열네 번째 이야기: 유쾌하고 진지하게 실천하는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이야기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 시리즈의 열네 번째 책은 『아무튼, 딱따구리』이다. 산업지속가능성연구소의 연구원인 저자는 생산 공정이나 비즈니스 모델 차원에서 지속가능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디자인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하는 저자와 딱따구리는 대관절 무슨 관계일까? 그보다, 딱따구리를 애호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아무튼, 딱따구리』는 ‘딱따구리 집’을 중심으로 지속가능 디자인 연구원과 영장류 학자 부부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일상이 펼쳐진다. 웃기고, 슬프고, 열 받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웃음을 짓게 하는 한편, 사람과 동물 모두가 처한 암울한 현실이 우리를 슬픔에 잠기게도 한다. 유례없는 폭염과 치명적인 대기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삶이 나날이 암울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져가는 동물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 현실에서, 『아무튼, 딱따구리』는 모두에게 짐짓 유쾌한 얼굴로 자신만의 딱따구리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할지 모른다.
_“타라라라라라락!” 내일도 들을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난다
모든 것을 장난감으로 만들고 싶었던 저자는 스무 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와 가방 디자인 브랜드를 만들어 신나게 활동했는데, 문득 자신이 만들어낸 제품에 사람들이 싫증을 내면 결국 쓰레기만 보태는 것이 아닌가, 회의가 밀려왔다. 그래서 고민 끝에 지속가능 디자인 전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이제는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속가능성 방안을 찾아 세계 각지를 누비고 있다. 저자는 지금도 영국과 서울을 오가며 살고 있는데, 행복하게 지낸 최근의 세 곳(강릉, 케임브리지, 고척동)을 돌아보니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딱따구리다! 세 곳 모두 집 근처에서 “타라라라라라락!” 하는 딱따구리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_지속가능 디자인 연구원과 영장류 학자의 애호하는 이웃, 딱따구리
물론 집을 찾을 때 처음부터 딱따구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무 연고도 없는 강릉에 신혼집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그때부터 딱따구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로 이사를 갈 때마다 우연찮게도 근처 야트막한 산이나 공원에 딱따구리가 살고 있어 언제든 딱따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쌍안경을 들고 나가면 열성적으로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 세 보금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방향이 가리키는 곳과 딱따구리가 맞닿아 있음을 차근차근 알게 되었다”면서 “딱따구리는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을 추구하는 길목에서 용케 발견한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런 저자의 곁에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남편 김산하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장류 학자 김산하는 인간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는 환경 만들기 운동에 온 삶을 투신하고 있으니,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_우리는 정다운 물건으로 채워진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원했다
저자는 ‘지속가능성’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일과 삶의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에 일상생활에서도 지속가능의 철학을 실천하고자 평소에도 소박하고 책임감 있게 살기 위해 애쓴다. 다만 환경문제에 열을 올리며 독설을 내뿜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디자이너로서의 감각과 익살이 녹아든 지속가능성을 실천하기 위한 경쾌한 방안을 찾아 두리번거려왔다.
우선 신혼집을 중고로 꾸몄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물건인데 남이 쓰던 물건이면 어떠리(「89퍼센트 중고로 집 꾸미기」). 마트에서 우주선 모양의 찜기를 고르는 할머니들의 대화를 엿듣고 “저희 집에 남는 거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라면서 끝내주는 오지랖을 펼치고(「우주선은 나눠 써야 제 맛」), 영국에서 타던 자전거가 고장이 나자 한국에서 타던 자전거를 영국까지 실어 나르는 극성을 떤다(「브러미와 흥나니」). 공대 다니더니 스타일이 이상해졌다는 친구의 구박에도 채러티 숍에서 코디하는 재미를 놓지 못하고(「채러티 부인의 사랑」), 음료를 종이컵 말고 머그컵에 담아 달라고 몇 차례나 강조하는가 하면 음식을 담은 스티로폼 용기를 살살 빼서 미리 돌려주기도 한다(「찰떡부부의 머그잔」). 대형 마트보다는 동네 슈퍼를 찾아 주인아저씨와 끈끈한 정을 쌓고(「미도할인마트」), 고물상에 수시로 찾아가 뭐 쓸 만한 거 없나 둘러보는 통에 사장님을 귀찮게도 한다(「고척동 고물상 단골손님」). 새 구경하는 재미를 동료들에게 전파하고 한밤중에 고슴도치를 만날 기대로 밤 산책을 나선다(「고슴도치의 밤」).
_딱따구리도 환경이 어떻든 간에 열심히 구애활동을 하고 씩씩하게 나무를 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저자의 이야기를 즐겁게,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가다가 우리는 묵직한 이야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로 일과 일상을 꾸려가는 여성인 저자에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환경을 생각하면 그리 당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어느 결에 당황스러움 속에서 깨닫게 된다(「21세기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 지속가능성 연구를 깊이 할수록 인류가 이 세상에 저지른 환경 재해의 규모와 심각성에 경악하게 된다는 저자의 고민은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동물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저자는 “우리 주변의 동물들과 영원히 못 만난다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고 토로한다. “뿌리 깊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자비함 때문에 헤어짐을 고하게 될 새들과 개구리와 벌레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울 준비를 해두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고 읊조린다.
_“여러분의 딱따구리는 어디에?”
환경영향으로 따지면 지구상에 인간만 한 족속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 저자는 “여러분의 딱따구리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묻는다. 저자는 딱따구리가 사는 곳에 집을 얻은 건 기막힌 행운이었지만 집 근처 숲에 사는 딱따구리의 존재를 알아본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멋쩍은 상황에서 용기를 내고, 버려진 것들의 가치를 알아봄으로써 생겨나는 기회를 순전히 행운으로만 볼 수 있을까?
유례없는 폭염과 치명적인 대기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삶이 나날이 암울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져가는 동물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 현실에서, 『아무튼, 딱따구리』는 모두에게 짐짓 유쾌한 얼굴로 자신만의 딱따구리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할지 모른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 00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 아무튼 시리즈는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시인, 활동가, 목수, 약사, 일러스트레이터, 직장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개성 넘치는 글을 써온 이들이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각권의 책에 담아냈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라는 교집합을 두고 다양한 주제를 솜씨 좋게 빚어 한 권에 담아 마음에 드는 주제를 골라 읽는 재미를 더했다(피트니스, 서재, 망원동, 쇼핑, 게스트하우스, 잡지, 스웨터, 계속, 택시, 스릴러, 외국어, 방콕, 로드무비). 길지 않은 분량에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져 부담 없이 그 세계를 동행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이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하나의 시리즈를 만드는 최초의 실험이자 유쾌한 협업이다. 색깔 있는 출판사, 개성 있는 저자, 매력적인 주제가 어우러져 에세이의 지평을 넓히고 독자에게 쉼과도 같은 책 읽기를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