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한 시대의 명저에서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
번역가 김석희,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새롭게 번역하다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등을 통해,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주저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번역가 김석희의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동안 몇몇 번역서가 나왔지만, 에리히 프롬의 육성과 숨결을 가장 잘 살려낸 번역본이라 부를 만하다. 또한 이 책은 한국어판 정식 계약본이기도 하다. 이 책은 28개국에서 출간되었고, 전 세계에 500만부 이상이 팔렸다.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통찰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저자 에리히 프롬이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두 개의 길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 세계에서의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도구화되었고,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진정한 안전은 모두 그 자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중 하나의 길을 통해서 그는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있고, 사랑과 일 속에서 자신의 감정적·감각적·지적 능력을 진정으로 표현하면서 바깥 세계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개체적 자아의 독립성과 본래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도 인간과 자연 및 그 자신과 다시 일체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길은 뒤로 물러나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그의 개체적 자아와 세계 사이에 생겨난 간격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길은 그가 ??개인??으로 결합되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와 그를 다시 통합시키지 못한다. 그와 세계의 분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길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도저히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번째 길을 특징짓는 것은 그 강박적인 성격이다. 또 다른 특징은 개성과 자아의 본모습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다.
심리학적인 각도에서 자유의 문제에 접근하다
프롬이 서 있는 심리학적 입장은 이른바 신프로이트학파 또는 프로이트 좌파라고도 불리는 입장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프로이트학파는 사회학화된 프로이트주의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생물학적이고 성욕에 뿌리를 둔 근본 충동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신프로이트학파에서는 사회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충동이나 욕구를 상정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성으로 뒤덮어버리는 범성주의(汎性主義)를 극복하고 있다. 이런 극복을 통해 프로이트의 천재적 통찰을 충분히 살리는 동시에 프로이트의 사회적 반동성을 극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과연 무엇인가?
프롬에 따르면 그것은 사회경제적 조건, 이데올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적 성격??이다. 이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새로 제시한 데 이 책의 큰 매력이 있다. 이것은 ‘부록’으로 딸린 ‘성격과 사회 과정’에 자세히 나오지만, 여기에서 세 명의 거인 사상가인 마르크스, 막스 베버, 프로이트를 인용하고 있는 점에 유념해주기 바란다. 말할 것도 없이, 역사를 움직이는 최종적인, 또는 특히 유력한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은 마르크스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은 베버이고, 인간의 심층 깊숙한 곳에 있는 근원적 충동(여기에서 개성이라는 개념과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을 생각한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프롬은 그중 어느 것이 결정적인 최종적 요인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롬이 특히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것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와 함께 역사에서 맡고 있는 사회적 성격의 역할이었다.
자유의 심리학적 측면을 분석하다
문제의 중점은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이래 인간을 종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해온 자유의 원리와 인간에게 고독감과 무력감을 주는 부정적 측면이 서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희구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유가 무거운 부담이 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심리적 온상이 존재한다.
프롬이 현대인의 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는 점은,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기계주의적이지도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위에서 강제된 ‘민주주의’는 더욱 획일적이 될 것이고, 충분히 기계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간신히 작동되는 기계는 더욱 불쾌한 독소를 내뿜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스컴이 조장하고 있는 현대인의 최면 상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공통된 현상이다. 따라서 자유가 주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와 함께 자유를 보람 있게 쓸 수 있느냐가 당연히 큰 과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