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저자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출판사
푸른숲
출판일
2019-09-01
등록일
2019-12-24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30MB
공급사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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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가장 세계적인 중국 작가
위화余華,
거장이 된 그가 젊은 날 책과 음악 속으로 떠났던
따스하고 다채多彩한 여정

생生을 헐어 쓴 글의 힘
소설만이 아니라 산문도 그렇다.
위화의 산문은 그의 다른 일가一家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가장 세계적인 중국 작가’ 위화(余華). 그가 젊은 날 책과 음악 속으로 떠났던 다채한 여정을 담은 에세이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로 한국 독자를 만난다. 젊은 시절 책과 음악의 세계로 떠난 여정에서 즐겨 읽은 고전문학과 좋아한 고전음악에서 얻은 위화 문학의 자양분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여행기다. 1993년 <인생>, 1996년 <허삼관 매혈기>를 출간하고 명실상부 중국문학을 선두에서 이끄는 작가로 손꼽히던 30대에 쓴 글을 모은 만큼 생명과 열정의 냄새가 코 끝 가득 차오른다. 이 책은 1997년 위화의 장편소설 <인생>(당시 제목 ‘살아간다는 것’)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허삼관 매혈기> <가랑비 속의 외침> <제7일> <형제>와 소설집 <내게는 이름이 없다> 등 위화의 소설을 꾸준히 출간해온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하는 산문집이다. 지금은 거장이 된 작가의 젊은 시절, 갓 벼려진 칼날 같은 통찰력을 시적인 문장에 담아냈다. 스스로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라 칭하는 글이니만큼, 위화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안내서가 될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소설을 쓰는 유일한 중국 작가다.
그의 소설은 서양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떤 유형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중국 작가 위화
그가 말하는 고전문학 그리고 음악

아시아의 다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점칠 때마다 빠짐없이 거론되는 작가가 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위화다. 위화는 현존하는 중국 작가 중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93년 처음 출간된 이래 중국에서만 400만 부가 팔린 <인생>으로 201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보다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후 발표한 <허삼관 매혈기>로 세계의 호평을 받으며 인기 작가 자리를 굳히더니 <제7일>과 <형제>로 중국 사회에 첨예한 화두를 던지고는 “가장 논쟁적인 작가”라는 이름을 얻으며 문호 반열에 올랐다.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은 독서와 음악 감상에 관한 개인적인 에세이다. 위화는 머리말에서 독서 행위를 상상의 새 ‘만만’에 비유한다. 만만이란 눈과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어 날기 위해서는 짝을 찾아야만 하는 새다. 위화는 문학을 만만의 한쪽에, 읽는 행위를 만만의 다른 한쪽에 빗댄다. 문학작품과 독서는 짝을 만나 날아오르는 만만처럼 서로 만나 한데 모여야 의미가 있다는 뜻일 터다. 따라서 이 책은 다름 아니라 짝을 찾아 날아오른 위화의 ‘만만’에 대한 이야기다.
문학이 만만의 한쪽이고 독서가 다른 한쪽이라면 누구든 자기만의 만만을 만들어 날아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히 위화의 만만을 다룬 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위화는 그럴 가치가 있는 작가다. <중앙일보>는 위화를 “현재 중국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이며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소용돌이 현대사를 강렬하고 감칠맛 나는 인간 희비극으로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해왔다.”고 평했다.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펴낸 소설 <인생>은 1990년대 중국의 평론가와 문학편집자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10권 중 하나로 꼽혔다. 그는 “중국의 당대문학 중에서 한국에 가장 널리 읽혀온 작가”(동아대학교 전성욱 교수)인 동시에 “중국이 가지고 있는 여러 얼굴과 그 얼굴을 가지게 된 연유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전 세계인들에게 중국을 들여다보는 창이 되어주고 있는”(<노컷뉴스>),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국 작가이기도 하다.

“한꺼번에 연주되는 음표의 활기찬 움직임과 달리,
글자는 한 줄 한 줄 조용하게 배열돼 있다”

음악과 문학.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공통점이 있기나 할까? 물론 있다. 음악과 문학의 공통점은 둘 다 ‘이야기’라는 것. 문학은 글자와 어휘로 이루어진 문장을 통해, 음악은 음표로 이루어진 선율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한다. 중국의 문호 위화는 에세이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을 통해 앞서의 물음에 우회적으로 답한다. 거장이 젊은 시절 고전문학과 고전음악에 대해 한 편 한 편 써나갔던 글을 모은 이 책을 읽고 나면 ‘둘 다 이야기’라는 답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대답을 얻게 된다. 위화는 21편의 글과 인터뷰를 통해 문학에 서술이 있듯 음악에도 서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서술의 도구는 글자와 음표다. 이렇게 음악에 서술이 있듯 문학에도 음악에만 있을 것 같은 선율이 있다. 문장의 리듬, 호흡, 길이가 각기 다른 선율을 이룬다. 세상에 같은 문장이 둘 없듯이 같은 선율 또한 둘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음악 서술 속의 화성和聲이 참 부럽다. 높낮이가 제각각인 소리가 여러 악기에서 동시에 연주될 때면 그 소리가 얼마나 오묘하고 얼마나 요원한지. 심지어 작곡가마다 달라서 슈베르트의 화성에서는 높낮이 다른 소리들이 서로에게 호의적이지만 메시앙의 화성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듯하다. 그리고 호의적이든 경쟁적이든 그들은 한데 어우러져 같은 방향으로 전진한다. (8쪽)
그렇다면 음악에는 있고 문학에 없는 것은 무얼까. 하나 꼽자면 ‘화성和聲, harmony’이 그렇다. 음표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화음이 또 다른 화음과 만나 자아내는 화성. 이런 화성의 특징은 동시성에 있다. 수많은 음이 같은 시간대에 울려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글자가 선처럼 늘어서 있어 순차적으로 읽어나가야만 하는 문학에서는 이런 화성을 구현할 수 없다. 어떤 소설가는 대구를 이루는 문장이나 단락 같은 문학적 기교를 통해 화성에 근접한 동시성을 구현하려 하지만 동일한 시간대에 모든 글자를 읽을 수는 없으니 화성에 근접할 뿐이지 같을 수는 없다.
화성은 단지 음악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위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위화에 따르면 문학에서는 해석의 열려 있음(개방성)이 화성을 결정짓는다. ‘읽는 행위’가 문학과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동시성이 바로 독서의 화성이라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누구나 자기만의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의미를 해석한다. 바로 이것이 독서를 다채롭고 풍부하게 하며 고유하게 만든다. 독서는 철저히 개인적인 행위이며 독자는 오직 텍스트와만 독대할 뿐이다. 텍스트와 독자는 같은 시간에 서로를 만나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때 각자의 독서는 자신만의 울림을(화성을) 가질 것이며 그 울림은 다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다. 이 책에서 위화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감상, 즉 자신만의 화성을 써내려갔다. 그러므로 이것은 위화가 짝지은 만만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의 귓가에 울린 화성에 대한 글이다. 그가 들은 하모니에 대해 써나간 이 책을 읽는 이들의 귓가에도 모두 저마다의 하모니가 울릴 테니 읽는 동안 귀를 기울여보길 권한다.

음악에 서술이 있듯, 문학에도 선율이 있다
이 책에는 20편의 산문(나머지 1편은 인터뷰)이 실렸다. 어떤 글은 문학, 어떤 글은 음악, 또 어떤 글은 문학과 음악에 대해 썼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6년 남짓한 기간에 걸쳐 쓴 글이다. 위화가 <인생>(1993)이라는 대표작으로 일가를 이룬 직후로, 이어서 <허삼관 매혈기>(1996)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을 무렵이다. 1960년생인 그가 30대 중후반과 40대 초반이라는 인생의 정점에 걸쳐 쓴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글에서는 찬란한 생명력과 젊음의 패기가 느껴질 뿐 아니라 일가를 이룬 사람의 자부심과 단호함, 그리고 겸손함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작가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첫 번째 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 글에서 위화는 “운명의 견해는 우리보다 정확하고 견해는 언젠가 진부해진다”는 구절로 글을 시작해 견해를 말할 때는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것과 어떤 견해든 의심하고 보아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견해를 피력한다.

따라서 수많은 견해에 시시콜콜 따지듯 접근해서는 안 된다. 운명의 견해는 우리보다 정확하고 견해는 언젠가 진부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 말을 믿었고 스스로를 그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작가로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그건 “나는 긍정 못지않게 의심을 좋아한다”는 단테의 말로 대변할 수 있다. (23쪽)

이 글은 작가의 견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위화의 대답으로 끝난다. 그에 따르면 작가란 현상 뒤편의 현실을 쓰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작가의 견해다.

보르헤스는 소설에서 “나는 며칠 동안 계속 물을 찾지 못했다. 지독한 태양과 갈증, 갈증에 대한 공포가 하루를 참을 수 없이 길게 늘여놓았다”라고 썼다. 이 구절이 감탄스러운 이유는 ‘갈증’ 뒤에 그보다 더 두려운 ‘갈증에 대한 공포’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작가의 견해라고 믿는다. (25쪽)

포크너, 가와바타, 카프카, 헤밍웨이… 가 자아낸 선율에 대한 찬탄,
그리고 멘델스존, 차이콥스키, 말러… 가 빚어낸 서술 뒤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들

이어지는 다섯 편의 글, ‘윌리엄 포크너’, ‘후안 룰포’, ‘따뜻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 ‘보르헤스의 현실’, ‘체호프의 기다림’은 위화가 영향을 받은, 좋아하는 고전문학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글이다. 윌리엄 포크너, 후안 룰포, 가와바타 야스나리, 프란츠 카프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브루노 슐츠, 후앙 기마랑스 로사, 아이작 싱어, 루쉰, 보르헤스, 할도르 락스네스, 스티븐 크레인이 차례로 등장한다. * 언급되는 작품 중에는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도 있다. (예: 할도르 락스네스 ?청어?)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은 삶처럼 소박하다. 산속의 돌이나 물가의 비탈, 먼지 날리는 도로, 미시시피강의 범람하는 홍수, 저녁 식탁과 술 중개상의 위스키 같고 활짝 열려 땀을 내보내는 모공이나 담뱃재 묻은 입술 비슷하다. 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것 등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향수도 없고 군더더기 화장이나 치장도 없이 맨발로 어슬렁거리는 듯하다. (28~29쪽)

실제로 후안 룰포는 <뻬드로 빠라모>와 <불타는 평원>에서 글쓰기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7쪽)

내가 보기에 문학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한한 부드러움의 상징이고 카프카는 극단적 날카로움의 상징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서술에서 응시를 통해 영혼과 사물의 거리를 단축시킨다면 카프카는 절단으로 그 거리를 넓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육체의 미궁이라면 카프카는 심리의 지옥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만개한 양귀비꽃처럼 혼곤한 잠으로 이끈다면 카프카는 혈관에 헤로인을 투입한 듯 강렬한 흥분을 일으킨다. (40~41쪽)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넘어서면, 조금 더 깊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현실과 신비 사이를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천일야화>의 서술 방식에 대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무시’라는 행위와 이야기 속 간단한 디테일이 어떻게 클라이맥스로 자라나는지에 대한 위화의 풀이를 볼 수 있다.
위화는 다른 글이나 강연 등에서 늘 심리 묘사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이 책에 실린 글 ‘심리적 죽음’ 또한 그에 대한 글이다. 여기서 위화가 예시로 불러오는 작품은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 로브그리예의 [질투],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포크너의 [와시], 스탕달의 [적과 흑]이다.

세헤라자데는 꿈속과 현실의 경계를 분리하고 합칠 때, 다시 말해 이야기의 서술이 경계선을 넘나들 때, 동일한 땅을 걸어가듯 경계의 존재를 무시한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경계에서 벗어나면 현실의 나라와 신비의 나라를 곧장 독립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는 <천일야화> 속 거의 모든 이야기에 보이는 서술 규칙이며, 그 뛰어난 기교는 서술의 장애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식으로 ‘무시’라는 간단한 행위를 채택함으로써 발현된다. (98~99쪽)

윌리엄 포크너, 도스토옙스키, 스탕달의 문장을 되짚어볼 때면 그들의 엄청나게 풍부한 서술에 붙들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내 소임은 그저 그들 서술의 특정 방면을 지적하는 것뿐인데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준다. 그들은 줄리앙 소렐의 손 같고 내 글쓰기는 레날 부인의 잡힌 손 같아서 나는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서술의 힘이다. 느낌을 드러내든 생각을 드러내든 작가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된다. (143쪽)

다음으로 나오는 세 편의 글에서는 작품 하나씩을 톺아본다. 카프카의 <성>,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모옌의 <환락>이 그 대상이다. ‘카프카와 K’에서 위화는 <성>이라는 작품을 통해 프란츠 카프카와 <성>의 등장인물 K의 유사성을 따져본다. 위화는 독자가 <성>을 읽고 K라는 인물이 토지측량사가 맞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듯 “똑같은 의혹이 카프카 생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과연 카프카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성>의 등장인물 K를 통해, 그리고 그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약간이나마 ‘진짜 카프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생의 마지막이 된 장장 12년의 집필 기간 동안 불가코프가 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해방되었는지를 다룬다. 불가코프는 카프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대적했다. ‘현실과 유머 관계를 구축’함으로써다. 이 유머가 불가코프 해방의 열쇠가 되었다.
다음 작품인 모옌의 <환락>은 아직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아 우리는 책에 나오는 인용문 일부로만 이 작품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공통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위화는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라는 표상에 주목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때 모옌이 서술자로서 가졌던 어머니의 이미지와 독자들이 공통으로 가진 공공의 어머니 이미지 간의 차이가 충돌을 만들어냈음을 설명하면서 <환락>의 서술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에서 프리다는 K가 아이처럼 솔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K의 말을 믿지 못한다. 그의 개성이 자신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에서이다. 발터 벤야민과 보르헤스도 카프카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다.
이는 문학이 카프카에 대해 하려는 말이기도 하다. 확실히 카프카는 문학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그는 흐름에 밀려서가 아니라 기슭에서 물길을 거스르듯 등장했다. (147쪽)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창작은 불가코프의 마지막 삶에서 가장 진실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과 거의 담을 쌓았던 이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는 창작을 통해 현실과 실낱같이 연결돼 있었다. 카프카에 이어 불가코프는 현실에 대적한 또 한 명의 20세기 작가가 되었다. 다만 카프카의 경우 현실에 대한 원한이 스스로의 내면에서 비롯되었지만 불가코프는 피부에 와닿는 고통, 되풀이되는 상처 때문이었다. (182쪽)

이제 <환락>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은 <환락>이 어머니의 이미지를 모독해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서술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환락>의 서술자가 선악이 한데 뒤섞인 서술 방식을 선택한 것만으로도 이미 독서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었다. (194쪽)

‘문학과 문학사’는 문학사에서 미미한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한 브루노 슐츠와 히구치 이치요라는 두 문인에 대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앞의 ‘어머니’에 이어서 브루노 슐츠 작품 속 ‘아버지’라는 표상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본다. 또 위화는 문학사에서 이들 두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가 터무니없이 작은 이유는 문학사가 ‘문학의 역사’가 아니라 ‘작가의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불만을 표한다.
이어지는 짧은 글 ‘회상과 회상록’을 읽으면 마르케스의 회고록이 왜 그의 인생이 아니라 그의 소설에 대한 내용인지를 알 수 있다.

카프카의 존재가 받쳐주고 20세기 가장 매력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를 쓰고도, 브루노 슐츠는 작품 수가 적어서 합당한 명성을 얻지 못했다. (205쪽)

환원이란 화학적으로는 확실히 가능하겠지만, 역사와 전기 속에서는 지식인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내 말은 설령 자료와 사진이 빈틈없이 당시의 광경을 재현하더라도, 서면과 구술의 기억이 당시의 디테일을 정말로 묘사하더라도, 어떻게 당시의 감정까지 재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25쪽)

책의 후반부에 자리 잡은 글 일곱 꼭지와 인터뷰 한 편은 고전음악에 대해 다룬다. 어린 시절의 작곡 경험과 고전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음악이 내 글쓰기에 미친 영향’)부터 시작해 보수성과 엄숙함, 내향성을 평생 견지한 브람스의 삶과 작품(‘음악의 서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클라이맥스’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음악과 문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빗댄 글이다. 위화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레닌그라드 교향곡)>의 서술과 호손의 작품 <주홍 글자>의 서술을 나란히 두고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놀랍게도 그는 쇼스타코비치와 호손, 그리고 <레닌그라드 교향곡>과 <주홍 글자>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해낸다.

원래는 그럴듯한 문화 활동의 차원에서 음향기기를 일상에 들여놓은 뒤, 친구들이 구스타프 말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도 끼어들어 쇼팽에 대해 논하거나 애매한 어휘로라도 카라얀에 대해 몇 마디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음악은 단숨에 사랑의 힘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달빛처럼, 혹은 폭풍우처럼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햇빛과 달빛을 받고 바람과 눈을 맞으며 다가오는 모든 사물을 맞아들여 그것들을 침잠시키고 소화시키는 드넓은 땅처럼 사람의 마음도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었다. (234~235쪽)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악은 각각의 시대와 다양한 국가 및 민족의 사람들, 다채로운 경력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와 다양한 인식에서 출발해 나름의 입장과 각양각색의 형식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똑같은 정성을 기울여 창조해왔다.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267~268쪽)

너새니얼 호손과 쇼스타코비치는 신비한 동일성 덕분에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시간만큼 긴 서술에서 동일한 클라이맥스를 경험했다. (287쪽)

‘부정’은 모차르트를 비난한 베를리오즈와 베를리오즈에게 실망한 멘델스존의 에피소드를 통해 음악 서술에서의 부정의 원칙에 대해, ‘영감’은 제목 그대로 소크라테스, 슈트라우스, 괴테, 차이콥스키, 말러, 마르케스 등 예술가에게 영감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본다.

사실 모차르트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비난과 베를리오즈에 대한 멘델스존의 실망은 많든 적든 모두 음악 속에 존재하는 부정의 원칙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논하고자 하는 부정이란 음악 서술의 스타일이나 관념의 다툼이 아니다. (315쪽)

내가 가진 자료에서는 두 가지 상이한 사실이 드러난다. 영감에 대한 고전주의의 해석은 예술 창작을 단순하고 정적으로 만들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이후의 해석은 창작 활동을 다가가기 두렵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해석이든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338쪽)

‘색채’와 ‘글자와 음’에서는 공감각을 동원한다. 전자는 소리와 색깔의 관계를, 후자는 소리와 글자의 관계를 탐구한다. 공감각 능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스크랴빈이 라흐마니노프와 언쟁을 하는 에피소드가 특히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글자와 음’에서는 글자로 이루어진 언어 서술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음악가가 언어로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느낌 이야기로 넘어간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스크랴빈은 원칙에서 동의한 뒤 음과 색의 접점에서 다른 주장을 펼쳤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E플랫 장조를 파란색이라고 여겼지만 스크랴빈은 딱 잘라서 자홍색이라고 단언했다. (341~342쪽)

시인이 언어의 소리를 어떻게 서술로 표현하는지 이해하고 나자 이번에는 음악가가 소리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는지 논하고 싶어졌다. (366쪽)

“생을 헐어 쓴 글의 힘,
일가를 이룬 장인들의 산문은 대체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젊은 위화의 안내에 따라 21편의 글을 넘나들고 나면 마치 ‘따스하고도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에 동참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은 거장이 된 작가의 옷자락을 붙들고 시간의 강을 천천히 거닐기라도 한 듯. 그리고 책을 덮으면 왠지 등을 떠밀려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귓가를 맴도는 선율과 가슴을 울린 서술은 나에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끌려 들어간다. 겁 많은 어린애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시간의 강을 천천히 걸어간다. 따스하면서 온갖 감정이 뒤섞이는 여정이다. 그들은 나를 이끌어준 뒤 돌아갈 때는 혼자 가라며 등을 떠민다. 돌아온 뒤에야 나는 그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56쪽)

일가를 이룬 예술가의 산문이란 그런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추천의 글’에서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에 대해, “일가를 이룬 장인들의 산문은 대체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지난한 숙련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경험적 통찰들이 정직하게 글을 떠받치기 때문이다. 생을 헐어 쓴 글의 힘이다.”라고 했다. 또한 “위화가 그의 문학적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바로 이 ‘정확성과 힘’이다. 소설만이 아니라 산문도 그렇다.”며 위화의 산문에 찬사를 보냈다.

포크너는 자신의 서술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았다. 그건 정확성과 힘이었다. 전투 때 탄알이 노리는 것이 모자의 흔들리는 깃털 장식이 아니라 심장인 것처럼 말이다. (28쪽)

소설가의 정수는 소설에 있을진대 왜 산문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소설로는 채 알 수 없거나 추론만 할 수 있는 작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하겠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은유로는 알 수 없는 날것의 사유들. 그러니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나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이 그렇듯) 소설가의 산문이 그가 쓴 소설보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더 높이 위치하곤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사상적으로는 멀게만 느껴지는 중국 작가의 산문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어느 나라의 누가 쓰든 문학이란 역시 시간을 뛰어넘는 무한함을 지니고 있으며 공간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진리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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