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 르네상스 피렌체가 낳은 이단아
500년 넘게 오해와 논란의 중심에 선 사상가 마키아벨리
그가 던진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피렌체로 떠나다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탐독했다고 하며, 니체가 이것보다 더 악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한, 유럽 혹은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고전 『군주론』. 그러나 이 책은 흔히 말하듯 성공을 위한 지침서도,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전략서도 아니다. 제대로 된 나라, 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리더가 해야 할 일을 탁월한 고전 지식과 탄탄한 현실 정치 경험을 통해 알려주는 책이다. 도덕이 아닌 정치, 정권이 아닌 국가를 중심에 둔 마키아벨리의 진심을 읽어내려면 르네상스 피렌체와 그 안에서 고군분투한 그의 삶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의 참모습을 만나기 위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열한 번째 책 『마키아벨리: 르네상스 피렌체가 낳은 이단아』는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도시 피렌체로 갔다. 그가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았던 피렌체의 구석구석과 시에나, 산지미냐노 등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보며 저자 김경희 교수는 독자들이 마키아벨리처럼 솔직한 맨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가 남긴 삶의 지혜에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영혼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다’고 말했던 마키아벨리의 진심을 들어보자.
“마키아벨리를 이해하려면 그가 기쁨과 분노와 희망과 좌절을
모두 겪은 삶의 터전 피렌체로 가야 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근대정치학의 초석을 놓은 『군주론』의 저자
권모술수의 대가, 기회주의자, 군주론자라는 오해를 걷어내고
마키아벨리의 진심을 읽다
단테,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고향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 피렌체에서
『군주론』에 담긴 시대를 앞선 지혜를 읽다
『군주국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513년이다. 정식 출간도 되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필사본으로 회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책이 헌정된 메디치가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저자가 죽고 난 1532년에야 정식 인쇄본이 출간되었다. 당대에는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묻혔다가 후대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책과 지은이는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마키아벨리는 우리에게 근대정치학의 문을 연 정치사상가로,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는 역사가나 작가로 기억되지만, 그를 말할 때 빼놓지 말아야할 것은 그가 피렌체공화국의 공무원이자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영혼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 마키아벨리. 그러나 정권 변동으로 인해 1512년에 14년간 몸담았던 공직에서 쫓겨난 뒤로, 그는 다시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퇴직하고 바로 이듬해에 완성된 『군주론』이 그의 생생한 현실 정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처음 마키아벨리가 붙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군주론』의 주인공은 ‘군주’가 아니라 ‘군주국’이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군주론』을 군주 ‘개인’이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방법을 담은 책으로 이해했다면, 마키아벨리 전문가 김경희 교수는 ‘국가’와 그 구성원인 ‘인민’에 초점을 맞출 때 『군주론』에 담긴 마키아벨리의 진심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군주론자인가 공화론자인가: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
세계의 중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지고, 상공업의 발전으로 부가 넘쳐나며, 문화와 예술이 부흥했던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 내 도시 국가들 간의 영토 경쟁과 알프스 이북 강대국들의 침략, 내부의 파벌 다툼이 끊이지 않던 피렌체의 정치 상황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불안정했다. 이런 번영과 혼란의 중심에 선 메디치가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한편,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쥐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바로 이 메디치가에 바쳐진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정이 메디치가의 군주정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살았다. 메디치가가 군주 가문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이는 피렌체 시민들의 공화정 복귀 운동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를 대체한 공화국 정부에서 외교와 국방을 맡아 일했고, 메디치가가 복귀한 뒤에는 자리에서 쫓겨난 데다 반메디치가 음모 혐의로 고문까지 당했다.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메디치가의 권력이 피렌체를 더 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방법으로 비판적 지지를 택하고 『군주론』을 썼다.
『군주론』이 정치의 중심에 군주를 두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파한다면, 『로마사 논고』는 고대의 로마공화정을 모범으로 삼아 공화주의를 지지한다. 비슷한 시기에 쓰인 두 책이 이렇게 상반된 주장을 담고 있는 탓에, 그가 군주론자인지 공화론자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져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아닌 국가에 초점을 맞춰 읽을 때, 두 책의 주장은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갖는다. 마키아벨리는 무엇보다 국가가 처한 위기 상항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한 가지 답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그는 군주론을 펴는가 하면 공화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우리가 몰랐던 마키아벨리: 르네상스의 근대인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에게 공직과 재산을 빼앗기고 머무른 피렌체 근교의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는 유배지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탄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정치서인 『군주론』『로마사 논고』와 역사서인 『피렌체사』뿐만 아니라 희곡인 「만드라골라」「클리치아」도 모두 이 시기에 나온 저술이다. 특히 「만드라골라」는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공연되어 인기를 모았고, 그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살아 있을 때 정치가나 역사가보다도 희곡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흘러넘치는 자유와 자본만큼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며 다툼을 벌이던 도시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그의 모든 저술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도덕이나 종교의 당위보다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했다. ‘때로는 악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인간론을 바탕으로 정치 또는 통치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정치에 관한 주장을 펼칠 때 당시에 지배적이던 종교나 도덕의 논리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욕망에 기초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근대성은 이렇듯 도덕주의 정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문제는 인민의 지지다: 살아 있는 지혜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구성하는 귀족과 인민의 관계를 정치의 핵심으로 보았다. 어느 한 계층의 독점적 지배가 아닌 다양한 계층의 참여와 균형을 중시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오스, 키케로를 거치며 전해 내려온 서양 공화주의의 전통을 수용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귀족과 인민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인민의 역할에 무게를 싣는다.
『군주론』은 흔히 군주 개인의 권력 장악, 즉 성공을 위한 전략서로 읽혀 왔다. 그러나 두 종류의 권력, 즉 개인이 소유하는 강제적인 힘과 주변 사람들의 지지에서 나오는 관계적이고 집합적인 힘 중에서 마키아벨리는 후자를 더 중시했다. 그의 눈에 피렌체가 나약하고 부실해진 원인은 인민이 무력해진 데 있었고, 이는 소수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며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사사화했기 때문이다. ‘모두의 나라’가 아닌 ‘그들만의 나라’에서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은 좌절과 박탈감을 느끼고, 국가는 분열과 반목 속에 활력을 잃는다. 따라서 한 나라가 강해지려면 그 안에서 다수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인민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유로운 상황 속에서 저마다 능력을 키우고 공동체의 주인으로 참여할 때, 국가의 활력이 살아날 수 있다.
500년 전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이 같은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한때 군주처럼 굴었던 대통령에 분노했고, 광장에 모여 정치제도와 민주공화국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500년 전 피렌체 시민들처럼, 우리도 국가의 평화로운 존립을 걱정하며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고민한다. 혼란과 위기 속에서 ‘정권’이 아닌 ‘국가’를 중심에 두고 사고했던 마키아벨리의 지혜를 다시 배우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