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붕괴된 문명으로부터의 피난처, 정신 나간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오아시스,
과거의 잿더미 위에 미래를 창조할 장소...
‘유토피아’는 그런 곳이어야만 했다.
적어도 내가 미치기 전까지는!
★ 하승수(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구본권(《한겨레》 선임기자) 강력 추천! ★
★ 《가디언》, 《옵저버》, 《GQ》가 주목한 화제의 논픽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처절한 기록
지구는 얼마나 더 뜨거워질까? 도시는 늘어나는 인구를 언제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식량은 정의롭게 분배될 수 있을까? 푸른바다거북이 플라스틱 섬에 가로막히지 않고 북대서양을 건널 날이 올까? 자본주의 체제는 탐욕과 부패로 종말에 이를까, 이대로 질주할까? AI는 인간을 소외시켜 마침내 SF영화처럼 기계 문명의 새 장을 열까?
이 모든 물음들은 결국 하나의 커다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자연과 문명, 더 나아가 우리 인류는 과연 지속 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와 개인은 잘못되어가고 있는 무언가를 바로잡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실험과 시도들을 계속해나간다. 그러나 만약 한순간에 모든 것들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면? 그래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과 사회적 안전장치가 깡그리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어쩌다 운이 좋아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너무 앞서나간 상상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이런 가상의 현실을 직접 실험해보려 한 괴짜 과학자가 있었다.
《유토피아 실험》은 딜런 에번스라는 영국의 한 대학 교수가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가정하고 자원자들을 모집해서 “현대 기술 없이도 수천 년을 살았던 마야인들처럼” 18개월 동안 실제로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보려 했던, 그러나 결국에는 자기 파멸이라는 파국으로 끝나버리고 만 ‘유토피아 실험’의 시작부터 ‘종말’, 그리고 그 이후를 다룬 흥미진진한 논픽션이다.
언어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정신분석학에 몰두한 뒤 로봇 공학과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구한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보여주듯(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그를 “실험복을 입은 알랭 드 보통”이라 표현했다), 이 책은 물질문명의 최첨단과 문명 붕괴 이후의 가상 세계 사이에서 지독한 희망과 지독한 좌절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한 과학자의 경험을 지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번영과 종말, 낙관과 비관, 문명과 원시,
제정신과 광기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다
“내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역시 미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분별 있는 개인들이 기후 변화의 위험을 경고하며 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세계가 위험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정상적인 공동체, 집단 사고나 미망에 물들지 않은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유토피아 실험은 이런 사회의 축도(縮圖)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상향의 축소판을 만들어보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은 저자는 살던 집도 팔고 가르치던 대학도 그만둔 뒤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의 허허벌판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듯했다. 살면서 지어본 농사라고는 기껏 호기심에 길러본 대마초가 유일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기에 적합하고 꼭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이 ‘유토피아 실험’에 지원했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씩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천막집 유르트를 함께 지어 올리고, 나무 데크를 만들고,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장작을 패고, 밭을 갈고, 물을 긷고, 요리를 했다. 비록 사슴 사냥에 실패한 뒤 기르던 돼지를 잡아 바비큐 파티를 할지언정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서도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유토피아 실험 초반의 평온함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저자가 나중에 회상하듯, “자원자들이 결국 내 신경을 갉아먹는 존재가 되리라고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피크 오일(석유 종말)이 임박했으며 문명이 ‘진짜로’ 붕괴될 것이라고 확신한 한 자원자는 자신이 예상한 문명 붕괴의 7단계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즐거워했다. 공동체의 규칙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위대한 영(靈)’의 명령에만 따른다는 괴상한 믿음을 지닌 또 다른 자원자는 무신론자인 저자와 모든 사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우리는 정말로 문명이 붕괴되리라 믿지 않으며, 단지 문명이 붕괴된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살게 될지 상상해보는 실험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설명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 혼란의 표정들은 다시 저자에게 더 큰 혼란이 되었다. 실험은 처음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문명은 모래 늪과도 같다. 벗어나려 애를 쓸수록
더 깊이 빨아들여 규칙과 규제로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토피아 실험 도중에 일어났던 어처구니없는 사건들과 그에 얽힌 복잡한 감정들을 가감 없이 풀어냄으로써 문명과의 연결과 단절,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과 개인의 광기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대표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장작을 패다가 손가락을 다친 자원자를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한 뒤에도 저자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원칙대로라면 분명 ‘유토피아 실험’은 문명과 단절된 원시의 공동체여야만 했다. 그렇다면 부상자를 병원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러다 패혈증으로 손가락이 아니라 손 전체를 잃게 된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저자는 “원시적 생활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반칙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상상력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하루는 또 다른 자원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확인한다며 컴퓨터를 사용하려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토피아에 컴퓨터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지만 저자는 “컴퓨터는 유토피아 실험에 자원할 사람들을 모집하는 용도로만” 제한했으면 한다고 설명한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일까? 유토피아에서 무엇은 허용되고 무엇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컴퓨터 사용을 금지하려는 저자에게 그 자원자는 이렇게 일갈한다. “난 뭐가 실험의 일부고 뭐가 실험의 일부가 아닌지 더 이상 잘 모르겠어. 딜런, 넌 어때?”
위기는 외부에도 왔다. 유르트라는 건축물을 세우고, 헛간을 부엌과 식당으로 개조하고, 직접 만든 갈대 하수 처리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관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건축 허가를 신청하는 기나긴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원시로 돌아간 자급자족 공동체 ‘유토피아’에서. 저자는 절망에 빠진 채 말한다. “문명은 모래 늪과도 같다. 벗어나려 애를 쓸수록 더 깊이 빨아들여 규칙과 규제로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원시적 생활을 실험하기 위해 무수한 관료주의적 절차를 통과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혀 재밌지 않은 아이러니였다.”
이처럼 《유토피아 실험》은 순수하고 공평무사한 탈(脫) 문명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수많은 좌절과 깊은 우울감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그려낸다.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와 상상력 없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유토피아 실험’이 보여준 상상력과 지속 가능한 미래
잉글랜드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발표한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때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nowhere)’라는 의미였다. 즉 인간은 저마다 완벽한 세상을 꿈꾸지만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딜런 에번스도 토머스 모어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 이름마저 ‘유토피아’라 붙인 실험을 감행했다. 그에게 “유토피아는 특별한 곳이자 제정신이 아닌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춘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오아시스, 곧 붕괴될 문명으로부터의 피난처, 과거의 잿더미 위에 미래를 창조할 장소”임이 분명했다. 적어도 그가 정신분열과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자기가 만든 ‘실험실’로부터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결국 10개월 만에 ‘유토피아’에서 탈출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된다.
《유토피아 실험》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꿈꾼 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절망과 파국만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대안 공동체나 생태주의 마을에 자발적 의지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와 철학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협력보다 경쟁을 통해 성장하라고 하며, 개인을 단지 소비자에 머물게 하는 현대 사회에 과감히 반기를 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와 상상력 없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매 순간 방황하는 이들에게 용기 있는 실천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명, 붕괴, 공동체, 생존, 그리고 유토피아. 모든 말들이 조금은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유토피아 실험을 처음 떠올리고 나서 했던 말은 의외로 단순명료했다.
스코틀랜드로 떠나기 일주일 전, 나는 친구 캐롤라인과 전화로 말다툼을 했다. 캐롤라인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이고 있다고 경고하려 했지만 나는 오만한 자만심에 친구의 염려를 무시했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내게 그 실험으로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지!” 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