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바퀴벌레들이 영국 의회를 장악했다?!
카프카의 『변신』 모티프로 그린 이언 매큐언의 신랄한 풍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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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시대의 영국 사회에 대한
이언 매큐언의 신랄한 풍자극
현대 영문학의 대표작가 이언 매큐언이 2019년 발표한 장편소설 『바퀴벌레』는 정치가로 변신한 벌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브렉시트 시대 영국 사회를 다룬 작품으로, 카프카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정치풍자 소설로 주목받았다.
브렉시트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의미하는 조어다.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되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합류한 지 47년 만인 2020년 1월 31일 영국은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을 떠났다.
그 배경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 증가와 대규모 난민 유입 등으로 유럽연합에 대한 국민 인식이 악화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탈퇴 여론이 있었다. 이에 보수당은 2015년 ‘유럽연합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걸고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유럽연합 잔류 결과를 예상하고 불만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2016년 국민투표를 단행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탈퇴 51.9%, 잔류 48.1%라는 결과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결정되었다. 캐머런 총리는 결과에 책임지고 사퇴했고 뒤이어 테레사 메이 총리가 취임했다. 탈퇴 협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북아일랜드는 유럽연합에 가까운 수준의 통합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협정안은 브렉시트 찬성파의 반대로 하원에서 세 차례 부결됐으며, 메이 총리 역시 국민투표 결과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이러한 자국의 우스꽝스러운 포퓰리즘 정치를 목도한 매큐언은 “엄청나게 절망했다”고 CBC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서 『바퀴벌레』를 쓰는 동안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며, 이 작품으로 브렉시트에 대한 여론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어둠 속에서의 짐승 같은 웃음”을 통해 사람들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현시대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 유머와 풍자라고 느꼈다고. 『바퀴벌레』는 바로 브렉시트 사태에 대한 매큐언의 첨언이다.
그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짐 샘스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그러나 『바퀴벌레』를 꼭 브렉시트에 대한 우화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작품은 자기 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꾼들로 들끓는 정치판을 비꼬는, 어느 사회에나 적용이 가능한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첫 문장은 카프카의 『변신』을 강하게 환기하지만, 『변신』에서는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반면 『바퀴벌레』에서는 바퀴벌레가 사람, 그중에서도 영국의 총리로 변신한다. 지난밤까지 바퀴벌레였던 짐 샘스는 곤충으로서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뒤집힌, 똑바로 누운 자세로 잠에서 깨어나 아연실색한다. 다리가 네 개뿐이고 잘 움직여지지도 않으며, 소름끼치게도 살이 골격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바퀴벌레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의 몸이 독자에게도 흉측하게 느껴지게 하는 매큐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은 대가의 솜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잠시 당혹감에 빠져 있던 짐 샘스는 자신이 종족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중임을 기억해내고 새로운 몸에 익숙해지려고 애쓴다. 곧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어 각료회의에 참석한 샘스는 놀라운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회의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정무장관, 내무장관, 법무장관, 원내대표, 통상부장관, 교통부장관 등이 그와 같은 존재, 바퀴벌레라는 것이었다! 외무장관 베네딕트만이 예외였다. 베네딕트의 몸에 들어갈 예정이던 바퀴벌레가 국회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까닭이었다. 인간의 몸을 훔쳐 영국 수뇌부를 장악한 최정예 바퀴벌레 군단의 신념은 단 하나다. 바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 그것이 바퀴벌레가 번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이제 바퀴벌레들은 장대한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일단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저 외무장관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이 작품은 『변신』과 더불어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도 닮았다. 스위프트의 평행우주처럼 느껴지는 『바퀴벌레』의 세상에서는 정치가들의 바보짓이 사소한 불합리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어리석음으로 확대된다. 샘스는 미국 대통령 아치 터퍼를 보고 트위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터퍼도 혹시 자신과 같은 종족이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들은 영국 사회를 영영 바꾸어버릴 ‘역방향주의’ 정책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다.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내세우나 실상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매큐언의 신랄한 풍자를 통해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바로 바퀴벌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