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 되다
인간의 몸은 과학기술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서로 다른 신체와 감각, 기술과 환경이 결합해
재설계한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인간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공동체의 생존과 유지, 향상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자연히 과학기술은 더 나은 내일, 위험이나 질병에 덜 노출되고 불편이나 불가능을 최소화한 미래를 목표로 삼는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그리는 미래 역시 물리적 거리나 환경의 제약 없이, 네트워크에 깊숙이 연결된 인간이 자신에게 맞춤형으로 설계된 세상을 매끄럽게 누비는 모습이다. 이 낙관적인 그림 속에서 인간은 기술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거나, 타고난 취약함을 각종 기계나 장비, 의약으로 대체?보완하여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들로 묘사된다.
각기 보청기, 휠체어라는 테크놀로지와 밀접하게 결합하여 살아온 김초엽과 김원영은 세계적인 테크 기업의 엘리트나 기술 관료, 미래학자들이 제시하는 이와 같은 ‘기술 유토피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그 최전선에 기계와 결합한 장애인의 신체를 놓고 ‘포스트휴먼’이니 ‘트랜스휴먼’이니 하는 손쉬운 비유를 끌어오는 논의들의 공허함을 지적한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성과가 질병을 치료하고 손상된 신체의 기능을 개선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삶에서 기계와 결합하는 일은 결코 매끄러운 경험이 아니며, 어떤 기술은 장애인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장애의 종식을 약속하는 말들은 장애를 가진 몸들이 지금, 여기의 환경과 조건에서 더 잘 살아갈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소리를 더 잘 듣게 하는 기술보다 수어나 문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로봇 외골격보다 휠체어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장애인들의 몸은 설령 같은 유형의 장애라 해도 규격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다. (…) 온정과 시혜로 뒤덮인 시선들은 장애인 사이보그의 현실에는 눈을 감고, 미래적인 이미지만을 기술낙관주의의 홍보 대사로 내세운다. 지금 이곳의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장벽을 해결하는 일을 ‘언젠가’ 기술이 발전할 미래로 자꾸만 유예한다. 경사로와 엘리베이터, 수어통역을 실현하는 데 최첨단의 놀라운 기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 87쪽
기계와의 긴밀한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이동 방식과 소통 수단, 일상의 지혜를 익혀온 장애 당사자로서, 두 저자는 장애인의 신체와 감각이 기술과 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정체성, 그 고유한 경험을 과감하게 과학기술과 미래 담론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이는 단지 기술낙관주의의 허구, 폐해를 지적하거나 그러한 논의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조건이 점점 더 기술문명과 깊숙이 결합해가는 시대에 기계와의 연결과 불화,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축된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덜컹거림, 이음새, 단차를 견디고 통합해온 장애인의 경험이 우리가 다른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아가 단지 손상을 보완하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 일부를 구성하여 장애인을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확장된’ 존재, 세계 및 타자와 ‘연결된’ 존재로 정의하는 계기로서 기술을 바라본다면, 모든 인간이 본연의 취약함과 의존성을 안고도 동등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하나로 움직일 때,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휠체어와 결합하고 다시 그 휠체어를 밀어주는 활동지원사와 접속할 때,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어긋남, 불화, 이음새의 단차를 넘어 결합해본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미래에 ‘증강해야 할’ 역량이다. (…) 나는 장애나 질병 등 취약한 몸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일부 테크 엘리트들이 꿈꾸는 자동화되고 매끄러운 사회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단차를 용기 있게 드러내고, 어긋난 이음새는 기꺼이 견디는 역량을 지닌 존재로서 말이다. - 250~251쪽
따라서 이 책에서 ‘사이보그’는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라는 사전적 정의를 훌쩍 넘어선다. 김초엽과 김원영은 인간과 과학, 기술, 자연, 환경 및 그 밖의 모든 물리적?문화적 구성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돌보며 함께 살아나가는 총체를 ‘사이보그’라는 상징으로 표현한다. 이 책은 그 최전선에 있는 ‘장애인 사이보그’의 구체적 현실을 살피며 위계 없는 세계, 정상 혹은 표준의 장벽 너머를 상상해보는 지적 여정이 될 것이다.
고치고 메꾸고 덧대고 수선하여
세계를 재설계하는 사이보그의 상상력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SF 소설가로 활동하는 여성인 김초엽은 그동안 자신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과 청각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연결 짓지 못했다. SF를 통해 다른 인지 및 감각 세계를 가진 존재들을 묘사하고 그들이 중심이 된 시공간을 창조하는 일은 자신의 장애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파트너인 김원영을 비롯해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가진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불친절한 세계를 돌파해나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또 공고한 위계와 정상성 규범을 뒤흔들며 세계의 구조 변경을 요청하는 용기를 마주하면서 비로소 자기 안의 여러 정체성을 연결,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신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과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김초엽은 자기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재구성하거나 변형 혹은 수선하며 과학기술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장애인들, 장애인의 필요와 접근성을 중심에 두고 도구와 환경을 설계하는 개발자들을 소개한다. 요리의 전 과정을 촉각이나 소리로 확인할 수 있도록 꾸며진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방, 휠체어의 층간 이동을 위해 경사로를 중심에 두고 설계된 주택,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통역 서비스, 어떤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섬세한 접근성 설정을 갖춘 온라인 게임, 장애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유튜버들에 이르기까지, 장애인들은 더 이상 온정과 시혜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지식 생산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김초엽은 최근 장애학 연구에서 제안된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장애 경험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기술을 재구성하고, 세계를 개편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장애인은 단순히 세계의 수용자이거나 세계에 의해 형성되는 이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하는 사람들이다. (…) 장애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 환경은 물론이고 지역 사회와 공동체를 ‘땜질’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장애학자들은 여기에 ‘장애인 세계 만들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에 적응하며 환경을 독창적으로 수선해온 작업들 (…) 이러한 일상의 지식들이 제대로 포착된다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취약함과 의존성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188~189쪽
이어서 김초엽은 최근의 SF 작품들에서 장애인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 장애인을 둘러싼 세계를 설계하는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SF라는 장르가 각자의 주관적 세계가 불완전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미래, 타인의 삶을 애써 상상하며 도달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사고 실험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SF는 다른 존재들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이야기이며, 과거와 미래, 우주와 심해에 인간을 데려갈 방법을 고안하거나 비인간 존재들이 거주 가능한 환경을 설계하는 등 ‘접근성을 탐색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초엽이 도달하고자 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몸의 상태에 위계를 부여하는, 신체와 정신의 유능함만을 추구하는 능력차별주의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며 ‘사이보그 중립’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이보그는 언제나 멸시와 우월 사이에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렇다면 트랜스휴먼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아이콘이 아닌,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소외된 기계 인간도 아닌, 단지 인간이 가진 하나의 중립적 특성으로서 ‘사이보그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 설령 그것이 아주 어려운 상상이라고 해도 나는 모든 사람이 ‘유능한’ 세계보다 취약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제 자신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더 해방적이라고 믿는다. (…)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우주선을 다시 설계해보자. 그러한 설계에는 수많은 도면이 필요할 것이다. (…) 우리가 그 무수한 도면을 함께 살피고 계속해서 수정해나간다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281~282쪽
매끄러운 세계에 등장한 느리고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몸들
이들이 벌린 틈새에서 써나가는 확장과 연립의 존재론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김초엽과 달리, 남들보다 확연히 짧은 다리에 긴 팔, 걸을 수 없는 몸을 가진 김원영은 어려서부터 자기 몸의 형태와 구조에 관심이 많았다. 표준적인 몸에 비해 어딘가 부족한 ‘없음’의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던 그는 열다섯 살에 처음 만난 휠체어와 함께 거울 앞에 섰을 때 ‘인간+휠체어’의 결합된 모습으로 그곳에 ‘있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는 정체성 물음 앞에 선 것이다. 그는 이 질문을 장애를 제거하려는, 즉 나의 ‘없음’을 없애려는 과학기술의 시선 앞으로 가져간다. 휠체어가 내 결함을 보완하는 도구일 뿐이라면, 아무리 최첨단 휠체어가 개발된다 해도 나는 여전히 ‘결여된’ 인간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휠체어를 내 몸의 일부로 여긴다면, 휠체어에서 내려온 나는 또 어떤 존재일까? 김원영은 자신의 이 오랜 문제의식을 각기 다른 신체 조건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계, 기술과 한 자리에서 만나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해소한다.
(휠체어를 타고 청각장애가 있는) Y는 오토박스를 장착하기 위해 2020년 늦여름 경기도의 한 자동차 공업사를 방문했다. (…) 장애를 가진 B는 자동차 정비사로서 전문성을 쌓으면서, 아마 그의 주변에 여럿 있을 휠체어 이용자들에게 필요한 오토박스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J의 아버지 A는 (청각장애가 있는) 자신의 딸이 (…) 보청기와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건축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딸의 친구인 Y의 장애와 기술이 맺는 관계, Y의 직업적 성장에 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Y를 잘 알기에 Y가 마스크를 쓴 사람과 대화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Y와 같은 휠체어를 이용하므로 (A는 잘 알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용 차량의 특수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Y와 나, J의 아버지 A, 정비사 B, J의 자동차, 오토박스라는 기계는 그 장소에서 만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협력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Y에게 적절한 오토박스를 새로운 자동차에 설치했다. - 111~112쪽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장애인의 몸을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장애를 극복한 ‘휴머니즘적 영웅’을 상찬하거나 기계와 인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횡단하는 ‘하이브리드적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 데나 놓여 있다가 사물들 사이를 수선하고 연결하는 청테이프처럼, 인간과 다른 인간, 과학과 기술, 문화와 환경의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의 취약함을 채우며 연립하는 관계에 주목하기 위해서다. 김원영은 이렇게 눈에 띄지 않지만 깊숙이 연결되어 서로를 돌보는 존재들을 (김혜리 기자가 영화 〈마션〉에 관한 글에서 쓴 표현을 빌려) “청테이프처럼 영웅적”이라고 표현한다.
기계와 한 몸을 이룬 장애인의 신체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몸을 패션화하는 것도 가능할까? 기계를 장착한 신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우아한 곡선형의 탄소섬유 의족을 신은 채 매끈한 몸매를 드러낸 패럴림픽 육상 선수 에이미 멀린스처럼 휠체어와 함께 아름다울 방법을 찾아야 할지, 휠체어에서 내려온 ‘자연스러운’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야 할지 여전히 갈등하는 김원영은 의족이 없으면 ‘발가벗은 느낌’이 든다는 에이미 멀린스의 말을 인용하며 휠체어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한다. 장애인의 몸에 장착된 인공 보철은 단지 도구나 디자인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집과 같은 장소라고 말이다. 이처럼 김원영은 책 전반에 걸쳐 휠체어, 보청기, 흰 지팡이, 의족 등 인공 보철과 결합한 장애인을 설명할 새로운 존재론을 탐색해나간다. 그는 애플이나 테슬라 같은 첨단 테크 기업들이 더욱더 매끄러운 디자인,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설계를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편을 호소하는 장애인의 역량에 주목한다. 다수가 편리하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나는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장애인의 존재는 매끄러운 세계에 균열을 내고 이음새를 띄우며 다시 한 번 사유할 기회를 준다. 그 벌어진 틈새에서 우리는 다른 신체와 감각, 정신세계를 가진 타자와 연결되고, 서로의 취약한 부분을 돌보며 곁에 선다. 김원영은 바로 이 틈새에서 출현하는 미래의 기술을 기다린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자는 나를 돕는 활동지원사이고, 안내견이고, 휠체어이며, 보청기이고, 오토박스이고, 청테이프이고, 친구들이며, 관객이고, 독자들이다. (…) 종이를 뜯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거울 속에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묻는 기묘한 형상의 10대 소년일 수도 있으며, 혜성처럼 나타나 이제껏 본 적 없는 우주 영웅을 그려내는 SF 소설가일 수도 있다. 어쩌면 동물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도무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세계와 정체성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이 ‘타자’들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기술, 사상, 정치적 신념과 지혜의 매끄러운 질서에 오류로서 등장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그런 오류를 배제하고, 몰아세우고, 깔끔히 치료하고 쓸어버리는 대신 오류가 열어둔 이음새 사이에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타자를 돕고, 타자로서 돕고, 타자를 돕는 일을 도우며, 미래-타자의 출현에 열린 지식과 기술은 어떤 얼굴일까. - 305~307쪽
김원영 × 김초엽, 파트너가 되다
김원영과 김초엽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장애권리운동의 자장 안에서 성장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신의 장애를 ‘결여’가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신체의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의 구조에 저항하는 관점을 키워왔다. 이런 관점에서는 장애를 치료, 교정, 제거하려는 과학기술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또한 과학기술의 성과로 생명을 유지하고 신체의 기능을 개선해온 당사자로서 과학기술을 배제하기보다는 그 방향에 개입하기를 선택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방향을 향하지만, 각자의 성별 정체성과 장애 유형, 지적인 배경과 삶의 경로에서 비롯한 서로 다른 주제를 펼쳐 나간다.
지체장애인이자 법률가, 연극배우이며 재활학교와 장애권리운동 공동체를 경험한 김원영은 몸의 형태와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밀고 나아가 그 몸이 인공 보철과 만났을 때의 상태를 무어라 규정할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울 수 있는지, 표준 혹은 정상적인 신체들로 채워진 공간에 이런 존재들이 등장했을 때 어떤 예상 밖의 만남이 일어나는지를 서술한다. 반면 감각장애인이자 SF 소설가, 과학 전공자이자 여성인 김초엽은 다양한 신체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창작의 영역 중심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도구와 환경과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모습에 더 관심을 둔다. 이 책의 뒤에 실린 대담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대화가 펼쳐진다. 평소에는 보청기를 잘 착용하지 않는 김초엽은 휠체어를 신체의 일부로 느끼며 그 미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김원영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장애인 당사자들의 공동체에 오랜 시간 속해 있던 김원영은 그런 경험 없이도 장애학의 관점을 체화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김초엽의 시각을 놀라워한다. 이들의 경험과 시각이 교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풍요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 또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큰 즐거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