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쓰기에 관한 책이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지우지 않는 법에 관한 책이다
-김원영(변호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현숙(구술생애사 작가, 《작별일기》 저자)
“빈 종이 앞에서 헤맸던 내 혼란의 시간이
당신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자기표현과 성찰의 글부터 위로와 공감을 안기는 글까지
내 삶은 어떻게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저자 홍승은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함께 글을 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곁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법을 알려주는, 더 나은 삶, 더 나은 글쓰기를 위한 안내서다.
홍승은의 전작은 이렇게 끝난다. “더 듣고 싶다. 내가 아직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그 책을 읽고 실제로 여성과 소수자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홍승은에게 사회적 차별이나 편견 때문에 평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홍승은은 타인의 내밀하고 고유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마운 만큼 아쉬운 마음이 쌓였다. ‘왜 이 이야기의 수신자는 나로 그쳐야 할까.’
그의 전작이 자기 목소리를 쉽게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면, 이번 책은 사람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직접 내보라고, 자기 삶을 글로 이야기해보라고 부추긴다. 저자는 쓰기의 근육을 단련하며 익힌 ‘글쓰기 요령’은 물론, 글쓰기가 불러온 삶의 변화 등 ‘쓰기의 가치’를 흡입력 있는 문장으로 들려주며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의 길로 이끈다.
홍승은의 글쓰기 수업을 찾은 사람들은 쓰면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글을 쓰면서 일상과 감정이 정돈됐어요. 여기 오기 전까지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동안 함께 쓰면서 어두운 동굴을 통과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어요.”(126쪽)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새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을 쓰고, 읽고, 다시 쓰며 내게 입혀진 말들을 벗었다”
글쓰기는 어떻게 나를 나로 살게 하는가
“승은 씨는 왜 글을 쓰세요?” 홍승은이 첫 책을 낸 이후 숱하게 받았던 질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입체적으로 존재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답했다.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글을 써요. 하나의 정보로 존재가 납작해지지 않도록, 제가 자유롭기 위해서요.”(5쪽)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여성, 이혼 가정 자녀, 탈학교 청소년, 비혼주의자 같은 홍승은에 대한 몇 가지 정보로 그를 쉽게 판단했다. 그들은 홍승은에게 “부모님이 이혼해서 어떡하니, 그래서 비혼주의자구나?” “사고 쳐서 고등학교 그만둔 거구나” “천생 여자 같네” “보기보다 여자답지 못하네” 같은 말들을 내뱉곤 했다.
그런 말들은 “귀를 통해 몸으로 성큼” 들어와 그를 규정지었다. 그는 어느새 남들이 ‘정상 궤도’라고 일컫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이나 부모님의 이혼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말을 의식하며 내면의 욕망이나 경험을 감추게 되었다. 글쓰기는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돕는 도구였다.
“20여 년을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온 나에게 오랜 편견을 벗겨내는 일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때를 벗기는 일과 같았다. 글을 쓰고, 읽고, 다시 쓰며 내게 입혀진 말들을 벗었다. 사회와 사람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을 발견하면 밤을 새우며 파고들었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작가의 글을 읽으며 위로받았다. 책에 내 경험을 셀로판지 대듯 겹치면서 편견에 왜곡되었던 내 경험과 감정을 재해석하고, 글로 썼다.”(6쪽)
책을 읽어가다 보면 ‘내 글과 삶을 권위 있는 누군가에게 위탁하지 않기’(39쪽), ‘내게 강요된 불합리를 의심하고 재배치하기’(63쪽), ‘침묵해야 할 이야기는 없음을 알기’(100쪽)처럼 글쓰기를 통해 나를 나로 살게 하는 법에 대한 여러 단서를 얻을 수 있다.
ⓛ 글과 삶을 위탁하지 않기
홍승은은 한때 청춘들의 멘토를 존경했고, 방황하는 자신에게 깨달음을 줄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처음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누군가 자신의 글을 봐주고 이끌어주면 글도 늘고 흔들리는 삶도 평안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아버지’의 허상을 깨달은 홍승은은 직접 곁의 사람들과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운영했고, 손쉬운 지적과 판단 대신 서로의 글에 공감하는 자세로 조심스러운 조언을 건네는 안전한 글쓰기 공동체 안에서 쓰기의 근육을 단련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니 누군가의 피드백 없이도 자기가 쓴 글에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더해야 할지 보였고,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섣부르게 누군가에게 내 서사의 편집권을 위탁해선 안 된다. 내 삶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므로.”(46쪽)
② 강요된 불합리를 의심하고 재배치하기
홍승은이 자신의 성적 경험을 털어놓았을 때, 사람들은 그를 ‘더럽다’고 비난했다. 홍승은은 그런 말들에 짓눌려 사회가 요구하는 ‘깨끗하고 순결한 여자’를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신에게, 여성에게 강요된 불합리한 감정을 의심하고 재배치하면서 자기 몸과 감정을 세심하게 돌볼 수 있었다. 이제는 더럽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을 부정할 때 느낀 수치심과 억울함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느끼는 감정이 더 견딜 만하고 자유로웠다. 이제 그는 남들이 더럽다고 손가락질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금의 자신을 만든 토대로써 인정할 수 있다.
③ 침묵해야 할 이야기는 없다
홍승은이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내 사소하고 사적인 이야기가 글이, 가치 있는 글이 될 수 있을까.’ 홍승은은 ‘나’를 지우고 ‘필자는’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교육받아왔던 과거를 비판하고, 끊임없이 사소하고 사적인 존재로 호명되어왔지만 어떻게든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자 했던 나혜석, 김명순, 아니 에르노 같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를 불러오며 말한다. “그간 무시당해 온 어떤 수다, 한숨, 웃음, 울음이 먼지에 쌓여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써야 한다.”(106쪽) 홍승은의 글쓰기 강연을 들었던 수강생들의 후기에는 이런 다짐이 있다.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이제야 내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101쪽)
“쓰는 사람이란 특별하게 관계 맺는 사람”
좋은 글쓰기의 관건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타자에게 상처받고 영향받으면서, 혹은 흠집 주고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간다. 타자와의 접촉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126쪽)
홍승은은 타인과의 접촉, 타인과의 관계가 글을 쓸 수 있는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승은에게 그 ‘방’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듣고 지지해줄 관계망이기도 하다. 그가 열었던 글쓰기 수업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팁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과 사람들이 글을 꾸준히 쓰게 해줄 안전한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쓰는 행위는 곧 읽히는 행위이고,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글쓰기는 누구에게 읽히느냐에, 첫 독자가 누구냐에 지속 가능성이 연결되어 있다.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기꺼이 읽어주고 따뜻한 지지를 보내주던 집필 공동체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꾸준히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쓰더라도 일기장에 고이 간직해 놓았을지도 모른다.”(29쪽)
“내가 계속 글을 쓰기 위해 필요했던 건 내 글을 함께 읽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보충할지, 내 사유가 어떤 부분에서 막혀 있는지 알려줄 안전한 관계망이었다. 관계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부터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다음이 내 이야기 쓰기다.”(45쪽)
타인과의 관계는 훌륭한 글쓰기 재료이기도 하다. 엄마, 외숙모, 할머니, 글쓰기 수업을 함께한 동료들, 동거인, 어느 강연에서 만난 성차별 같은 건 없다고 따지는 무례한 사람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요절하신 이모 등이 이 책에 등장한다. 타인과의 일화를 그대로 옮긴다고 글이 되는 건 아니다. 홍승은은 “누군가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일, 관성적인 질문이 아닌 다른 질문을 던지는 일, 애정 어린 관심을 갖는 일”이 필요하며, “존재를 다각도로 볼 수 있을 때 글에도 숨이 붙는다”고 말한다.
가령, 어느 날 홍승은은 “잘 지내시죠?” 정도의 형식적인 안부만 여쭙던 외숙모에게 평생 하지 않던 질문들을 건넨다. “외숙모는 외할머니한테 서운한 건 없었어요? 외삼촌과는 언제 결혼하셨어요? 외삼촌하고 대화 많이 하세요? 계속 농사일을 하셨어요?”와 같은. 그 질문들을 통해 비로소 외숙모를 외숙모가 아닌 한 명의 사람, 딸, 아내, 엄마, 며느리, 농부로 만날 수 있었다고 홍승은은 이야기한다.
“아마 3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지금도 외숙모는 ‘외숙모’로만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그저 질문 하나 다르게 던졌을 뿐인데, 한 존재가 풍경에서 쑥 튀어나왔다. 나와 대화하고, 손잡고, 안을 수 있는 존재로. 누군가를 풍경의 배경으로 여기는 것만큼 고유성을 지워버리는 간편한 방식은 없다. 글에 생기가 줄고 관점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내 애정을 먼저 의심한다. 눈앞의 존재를 고정된 물체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지 묻는다.”(147쪽)
그동안 평면적으로 존재했던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끊임없이 호명하는 홍승은의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은 나와 타인을 지우지 않는, 숨이 붙어 있는 좋은 글쓰기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