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사랑은 이별로 끝난다지만, 이별은 무엇으로 끝날까? 5월에서 6월로 바뀌는 동안, 호수공원의 장미꽃들이 피었다가 지는 동안, 미세먼지로 뒤덮였던 하늘로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싶더니 다시 화창한 아침이 찾아왔고, 문득문득 나는 이 책을 펼쳐 읽었다. 이별의 말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날마다 헤어지고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괴로움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부재가 존재만큼이나 구체적으로 느껴질 때까지. 놀라워라, 이별이 끝나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이 책은 저 먼 이별의 끝에서 뒤늦게 도착한, 길고도 다정한 별사(別辭)다. _김연수(소설가)
“이별은 왜 왔을까. 우리는 왜 헤어져야 했을까.”
《아침의 피아노》에 이은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이었던 《아침의 피아노》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고 김진영 선생님의 두 번째 산문집 《이별의 푸가》가 출간되었다. 2017년 《현대시학》에 일부 연재했던 원고는 선생 사후에 ‘이별의 푸가’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채 남겨졌다. 《아침의 피아노》가 한 철학자가 삶의 끝에서 바라본 ‘삶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마음’을 담았다면, 《이별의 푸가》는 삶 내내 지녀온 ‘이별의 아픔’과 ‘부재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짧은 글 86개로 쓰인 이 단상집은, 마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생의 모든 이별의 순간을 자신 앞에 좍 펼쳐놓고 세어보듯이, 이별할 때 지나야만 하는 모든 순간을 빠짐없이 쓰다듬는다. 만나고, 후회하고, 추억하고, 침묵하고, 눈물짓고, 분노하고, 미련을 놓지 못하고, 부재함을 느끼고, 비참해하고, 허전해하고, 분열하고, 아파하고, 욕망하고, 기뻐하고, 대수롭지 않아 하고, 유치해하고, 뻔뻔스러워하고, 냄새를 맡고, 목소리를 떠올리는…… 이별의 매 순간은 세세히 그리고 서서히 우리의 몸속으로 스며든다. 거리에서, 차 안에서, 그 사람의 집 앞에서, 준비된 말이나 어떤 포즈도 없이, 이별을 견뎌내야 했던 어느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묻게 된다. “이별은 왜 왔을까. 우리는 왜 헤어져야 했을까?” 그 사람이 아닌, 그 이별의 순간을, 그 부재의 아픔을 떠올리면서.
《이별의 푸가》의 86개의 단면들은 하나의 선율을 따라 모방하듯 서로 쫓고 쫓기며 이별이 가진 일상성을 철학적 성찰의 지점으로 데려간다. 이별이 흘리는 슬픔과 외로움과 애태움과 아픔은 어느덧 침묵과 적요로 바뀌어서 “왜 이별해야 했을까?”라는 개인적인 질문에 “이별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고민을 더한다. 이별하는 연인들의 고통과 이별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일상의 무거운 면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롤랑 바르트와 프루스트, 그리고 아도르노, 한트케, 파스칼 등의 글과 말을 연결시키며 이별이 가진 이미지와 개념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건넨다. 《아침의 피아노》의 단정하고 깊고 맑은 문장들이 생에 대한 빛나는 명랑성을 보여주었다면, 그리고 그 모습이 선생이 본 아침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별의 푸가》의 열정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강인하면서도 집요한 문장들은 이별에 대한 아련한 잔상들을 뜨겁고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그건 꿈처럼 도착했던 선생의 어느 저녁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은 귀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사랑과는 이별을 해도 이별과는 이별할 수 없는 걸까?
이별이란 뭘까? 《이별의 푸가》는 그 질문을 통과하기 전에 몇 가지 다른 질문을 지나치라고 말한다. 만남이란 뭘까? 스침이란 뭘까? 이름이란 뭘까? 사랑이란 뭘까? 쓸모없음이란 뭘까? 《이별의 푸가》에서 말하는 이별의 주체란 이렇게 만나고, 스치고, 이름 불리고, 사랑을 하고, 완전히 쓸모가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될 수 있다. 이별 뒤에 언제나 당신이 원하는 건 더는 자기를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이다. “나를 생각하지 말아요, 나를 그리워하지 말아요, 나를 잊어버려요,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이것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별의 주체가 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별이란 뭘까? 이별은 사랑이 패배와 배신으로 건너가는 분기점이며 동시에 사랑이 그 운명으로부터 구원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너무 아파하면서도 이별을 끝내지 못하는 건 이별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당신의 부재 때문이다. 그 부재 속에 여전히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재는 스스로 만들어낸 주관적이며 상상적인 부재이다. 당신이 떠났다는 사실은 이 결핍의 부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별의 푸가》는 말한다. “부재 속에 당신이 있는데 어떻게 당신의 없음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부재의 시간이 ‘사랑의 끝’이나 ‘사랑의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6개의 이별의 단상들은 ‘사랑의 단상’을 품고서 ‘사랑의 끝은 이별인데,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라고 끝내 질문할 뿐이다.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사랑이 끝나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아도, 계절은 다시 온다
《이별의 푸가》의 단상들은 우리를 이별 속으로 끌어당긴다. 우리는 이별한 사람이 되어 이별 뒤에 찾아오는 여러 일들을 겪게 된다. 먼저, 말들이 사라진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서 말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진다. 그다음에는 꿈을 꾼다. 캄캄한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더라도, 꿈속에서 당신을 보는 순간 불안이 가신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연락이 올까 봐.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씻는 것도 싫어진다. 깨끗이 씻은 뒤에, 아름답게 꾸민 뒤에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 발작이 시작되기도 하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먹기 싫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한꺼번에 슬퍼할 수조차 없이 슬퍼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슬픔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이별 뒤에만 남겨지는 길고 긴 피로와 맞닥뜨린다. 하지만 《이별의 푸가》에서 말하는 이별은 그 피곤함마저도 소멸할 때 일어난다. 그 피곤함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당신의 부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게 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이라면, 이별을 한다는 건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물살을 따라 끝없이 떠내려가는 것이다.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순간은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이별의 주체’가 된 우리는 이제 뗏목을 타고 당신을 통과하고 초과한 채로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다다른다. 《이별의 푸가》가 그리는 세상은 바로 그 끝에 있다. 꼼짝없이 남겨진 우리가 결국 다다르고야 마는 이별의 폐허다. 우리는 그 폐허의 현장을 산책한다. 길가에 피어난 꽃을 보기도 한다. 다만, 당신의 부재에 머무는 일만큼은 잊지 않는다. 우리는 울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시를 쓰지 않는다. 대신 당신의 부재가 당신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당신이 옆에 없음에도, 당신과 함께하고, 당신의 부재 속에 머문다. 약속을 껴안듯이 희망을 껴안듯이 이별을 껴안는다. 우리는 이제 안다. 사랑이 끝나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아도, 이별의 계절은 결국 다시 온다는 걸. 우리는 본래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이별의 주체라는 걸. 날마다 헤어지고 영원히 이별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근사한 책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