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왜 사람은 누군가를 안는 구조로 생겨서
타인을 갈망하게 되는 걸까”
등단 1년 만에 김수영문학상 수상
‘슬픔과 명랑의 시인’ 문보영 작가 첫 산문
“즐거운 일기든 아픈 일기든
일기는 나로 하여금 시간을 건너게 한다”
브이로그를 하는 시인, 힙합 댄스를 추는 시인, 1인 문예지 발행인…. 문보영 시인은 다채롭고 독창적인 시 세계만큼이나 일상도 힙하다. 대학에서 문예창작 수업을 듣고 시에 빠진 문보영 시인은 역대 최단 기간인 등단 1년 만에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한 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문보영 시인의 첫 산문집인 이 책은 작가가 블로그에 올렸다가 비공개로 돌린 20대 이후의 일기들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기는 어딘가 수상하다. 문보영 시인에게 일기는 “사실을 기록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기라는 이름을 빌려 예측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쳐나간다. 이렇게 쓰인 일기들은 나중에 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20대라는 시간을 건너는 동안 시인이 겪은 아픔과 슬픔을 용기 있게, 재기발랄하게 써내려간 성장의 기록이다.
인생의 어떤 구간을 건널 때 누구나 항아리를 받게 된다. 정확한 명칭은 ‘눈물항아리’인데, 각자의 신장에 따라 1리터짜리 항아리를 받기도 하고 3리터짜리나 12리터짜리를 받기도 한다. (중략) 이 책은 12리터짜리 항아리 안에 든 눈물을 비우던 나날의 일기들이다. 흩어져 있던 일기를 책으로 엮으며 찬찬히 읽었다. 항아리 바닥에 남아 있던 눈물은 일기의 햇살을 받고 증발했다. 즐거운 일기든 아픈 일기든, 일기는 나로 하여금 시간을 건너게 한다. _‘책을 내며’ 중에서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보며, 또 글을 읽으며 시인이 힘을 얻었듯이, 자기만의 눈물항아리를 안고 인생의 어떤 구간을 건너가는 이들에게 이 산문집이 다정히 말을 건넨다. 때로는 명랑하게, 때로는 가슴 먹먹하게 삶을 같이 견디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왜 사람은 누군가를 안는 구조로 생겨서
타인을 갈망하게 되는 걸까”
1부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에는 시인과 연애했던 여러 명의 애인이 등장한다. 인디언주름이 예쁜 애인, 아픈 애인, 툭하면 선물 공세를 해대는 애인, 호시탐탐 일기장을 훔쳐보려는 애인…. 여러 애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시인은 마침내 “애인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새 애인을 사귈 때마다 “한 고아원에서 다른 고아원으로 옮겨가는 기분으로 짐을 싼다.” 아픈 연애의 기억이 유쾌할 리 없지만 시인 특유의 재기발랄한 문장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2부 〈나는 서른 전에 이혼하고 싶다〉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결혼이 마치 사랑의 결말인 듯 말하는 세상에 반발한다. 사랑한 것이 운명이지, 결혼한 사람들만이 사랑에 성공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서른 전에 이혼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회를 바라며, 이혼은 비정상적이라고 낙인찍는 사회에선 결혼이고 뭣이고 안 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가족 형태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공동체만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 말이다. (중략) 평생 사랑하자고, 우리 사랑 변치 말자는 호러에서 해방된 사회. 나는 나대로 살고 싶다. 내 속도대로, 내키는 대로. 침대와 벽 사이 아늑한 공간에서 여생을 보내는 나의 널브러진 브라자처럼.” _p.74
“나에게 시는 너무 솔직해지지 않는 연습”
3부 〈삶에 성의를 갖기가 어려워요〉는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를 드나든 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갓 등단했던 신인 시절, 시인은 문단에서 경험한 폭력으로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는다. 처음에는 우울증인지 모르고 ‘극복일기’를 쓰다가 필력만 늘었다고 자조한다. 시인은 또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딴짓을 시전한다’. 문학에 대한 혐오와 우울증이 겹친 시기에 일기의 확장판으로 브이로그를 시작하고, 손으로 쓴 일기를 독자들에게 일반 우편으로 배달하는 것 등이다. 삶에 성의를 갖기가 어려워 정신과 약을 먹고, 행복은 과분하니 무난하게라도 살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함이 마음을 울린다.
4부 〈애인이 쓰던 칫솔은 쓰레빠 밑창을 닦을 때 쓴다〉에서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이야기한다. 도서관을 다니고, 인생이 너무 심각해질까 봐 춤을 추고, 낭독회에서 독자를 만나고, 고시원에서 지낸 날들에 관한 이야기다. 시와 문학에 관한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말한다. 문학이란 무언가를 깊이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인데, 자신이 무언가를 깊이 이해할수록 우물 밖의 세상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말았다고. 문보영 시인에게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자 “너무 솔직해지지 않는 연습”이다.
왜 사람들이 웃을 때 나는 웃지 못할까? 생각해보면, 세상이 웃는 방식으로 내가 웃었다면, 애초에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미소 짓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미소 지었으므로 시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슬픈 이야기다. _p.173
5부 〈사랑하는 것을 너무 미워하지 않으며〉도 작가 특유의 위트가 반짝인다. 망설임을 연습하기 위해 아침에 전화영어를 하는 등의 소소한 일상과 사이공으로 떠난 ‘막간 여행’에 관해 들려준다. 친구와 단둘이 떠나는 사이공 여행은 출발부터 엉뚱하고 불안하다. 연이은 해프닝을 겪으며 시인은 초긴장하지만 독자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에 빠져든다. 이 여행의 끝에서 시인은 꿈을 묻는 독자의 편지를 받고 이렇게 답한다.
내가 바라는 게 무얼까요? 기대 없이 살기인 것 같습니다. 열망은 나를 지치게 하니까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 눈 감고 넘어가기. 피자를 바라면 피자가 늦게 오듯, 나 자신을 희망에서 구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것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으면서 사는 것이에요. _p.237~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