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그리움이다
들어가는 글
여기서 나가는 지점을 생각하고
돌아와 편안한 순간을 기억하다
여행은 사랑과 닮았다.
둘 다 각자의 상황에 맞는 사적인 영역이다. 나는 미묘하게 여행 전 쌓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주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다녀오는 편이다. 다녀와서 풀어내고 싶으면 풀어내고 흘려버리고 싶으면 흐르게 둔다. 스페인 여행을 통해 어린 시절의 나를 풀어내게 되었다.
어린 나는 여행이 좋았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는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졌고, 돌아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안심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1960년대의 한국전쟁 실향민 친지들은 우리 집에 내려오면 한 달은 머물렀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먹고 자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곤 했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사라졌지만 잿빛 사진처럼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먼 길을 떠나고 돌아오는 그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겹쳐진 곡선이 만들어낸 전차길 위로 사람이 걷고, 차도 지나갔다. 신작로에 먼지를 날리며 뽐내던 시발(始發)택시, 증기기관차의 굉음과 수증기 그리고 통통배에 대한 기억은 기분 좋은 추억이다.
두 번의 서른 해가 지나도 내 가슴속에 살아 있는 할아버지!
중절모와 양복 그리고 지팡이로 멋을 내고 먼 길 먼 곳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다양한 사람들과 처음 보는 곳으로 이끌고 간 곳은 항상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내 나이 열 살 되던 해, 오월에 신선(神仙)이 되셨다. 상여를 뒤따라가던 처연함과 설움은 하얀 상복과 푸른 하늘, 그리고 화려한 만장과 커다란 종이 꽃송이들에 오버랩 된다. 내가 살던 곳에서 나갈 수 있는 지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돌아와 편안해하는 순간을 기억한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떠남과 돌아옴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내가 읽은 세상이다.
터키와 이집트에서 본 그리스·로마의 흔적은 새로운 여행의 씨앗이 되었다. 나이 오십이 되어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을 본 감격은 나로 하여금 ‘세계문명의 발상지를 찾아보자. 삼
년에 한 번씩은 여행을 계획하고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만들어보자’고 마음먹게 하였다. 사실 그런 꿈은 훨씬 앞서 중학교 때부터 미리 심어놓은 지뢰였는지도 모른다. 내겐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고대 그리스·로마를 노크하였다.
차창 너머로 양떼들이 지나가고, 레몬트리가 군데군데 줄지어 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선 선인장이 가로수처럼 도열해 있다. 오렌지나무에서 떨어진 것들은 꽃잎이 툭툭 떨어지듯이 방치되어 있다. 소박한 길, 그저 누군가가 닦아 놓고 지나간 길들이 조급함을 타지 않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터키에 함께 갔던 L은 스페인을 꼭 가보라고 권했다. 그는 정말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경쾌한 어조로 즐거움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때부터 미지의 나라를 가슴속에 묻어 키웠다. 진심어린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싹이 될 수 있다.
나의 스페인 여행은 가족과 사회에 내 몫을 한 뒤 얻은 티켓이다. 참고 이겨낸 뒤 자신에게 한 선물이자 약속이다. 가슴속에는 아직 청춘이 살아 있고, 꿈을 꿀 수 있고, 실컷 그리
워할 수 있는 이름이 있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태양과 함께하는 스페인은 태양의 빛과 그림자가 선명했다. 찬란하다 못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피해 그늘과 숨바꼭질을 하였다. 태양의 찬란한 자유에 나는 거역하지 못한 채 태양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다. 삶이 이토록 환하고 빛나는 것이었던지…….
밤 열 시가 되어서야 해가 겨우 넘어가는 곳, 살포시 검푸른 어둠의 장막이 사람들의 일상을 달래주고 쉬게 해준다. 낯선 색깔들에서 낯익은 색깔을 마주하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풀어내고자 한다.